ep1.
2001년 광주비엔날레에서 한 작가는 예전에 교도소로 썼던 건물의 앞마당에 큰 태극기를 뒤에 꽂은 자전거 20여대를 비치해 놓았다.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그 자전거를 타고 놀면, 교도소의 앞마당은 옛 3월1일의 아우내장터처럼 태극기의 물결이 되는 것을 의도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광주/옛 교도소 건물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애국심이 북돋아 가슴뭉클했을지 모르지만, 난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독립운동/민주화항쟁 때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던 그 태극기들과 21세기에 멀뚱하니 자전거 뒤에서 펄럭이는 태극기 사이의 괴리감. 백주대낮에 낯선 사람이 뮤지컬하듯 노래로 길을 물어오는 것 같은 황당함, 민망함.
ep2.
2002년 월드컵때였다. 집으로 가는 심야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한 무리의 붉은악마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온갖 응원도구와 복장을 갖춰입고 환호하며 거리를 뛰어다니다가 내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오게 되었고, 아저씨든 아줌마든 관계없이 하이파이브를 '요구'해왔다. 나는 한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가방과 쇼핑백을 든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에 뻘쭘해 하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에이~ 그러면 안되지' 하면서 담배를 끄던, 커피를 옮겨잡던 하이파이브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기다렸고, 할 수 없이 나는 담배를 버리고 가방을 다리 사이에 끼운채 하이파이브를 받아주어야 했다.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그는 약 2~30초의 시간을 (담배를 버리고, 손가락으로 가방과 쇼핑백을 손 안에서 나눠잡고, 가방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커피캔을 쇼핑백을 쥔 손으로 옮기고 한 손이 빌 때까지 기다린 시간) 기다린 셈이고, 나는 그를 위해서 그 복잡한 과정을 수행했던 것이다.
ep3.
1994년인가... 아마 그쯤의 월드컵일 것이다. 브라질인가... 어느 나라 모 선수는 (하하하, 하든 보든 스포츠는 그닥 많이 즐기는 편이 아니라 기억이 가물가물) 골 세리머니로 '아이를 안고 어르는' 동작을 했었다. 그 때 해설 위원은 그 선수의 아이가 며칠전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몇년 후 그 나라 축구팀은 두 팔과 무릎으로 기는 행동을 골 세리머니로 보여주었다. 그 때 태어난 아이가 이제 기어다닌다는 뜻이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재밌는 세리머니를 난 본 적이 없다.
이번 2회 WBC에서 우리나라는 또,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았다. 그리고 나는 또, 마음이 불편해졌다. 저 태극기는 비엔날레 자전거 뒤에 달렸던 태극기일까, 유관순누나가 들었던 태극기일까. 아니면 2002 월드컵 이후로 새로운 의미의 태극기가 등장한 것일까.
깃발, 특히 국기는 그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정도로 압축된 상징이다. 국기도안의 어느요소도 그 나라의 특징과 닮지 않았으면서도 각각의 고유한 정체성을 갖고 있고, 비주얼이 거의 의미없는 순수한 텍스트이다. (어느 누구도 국기가 비슷하다고 덴마크와 스웨덴을 혼동하지 않으며, 독일과 벨기에의 국민들 성향이 비슷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깃발을 뺏는 간단한 행위만으로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놀이가 성립되고, 적국의 수도에 국기를 거는것이 국가수장의 항복문서보다 더 값지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것이 스포츠에 등장했다. 아,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국기게양은 시상식의 맨 마지막 순서일테니까. 그리고 팀 자체가 국가를 기준으로 구분지어진 무리이니, 팀의 아이덴티티로 그만큼 적확한 것은 없을 것이다. (태극기를 꽂는 걸 불편해 하는 나 역시 KBO 깃발을 꽂느니 차라리 태극기가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꽂다"라는 동사에 있다. 깃발(또는 국기)은 일반적으로 제유법을 동반한다.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새끼처럼 깃발(국기)이란 명사는 동사의 역동성만을 가져와 스스로의 힘을 크게 키운다. "~을 꽂다", "~을 휘날리다", "~을 불태우다" 등의 동사는 그 힘을 오롯이 명사(깃발)에게 빼앗기고 스스로의 고유의미는 변한다. 깃발은 일반명사가 아닌, 거대한 권력-단어 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제유적인 속성때문에 깃발은 그 뒤의 서술어에 따라 완전히 다른 뜻을 갖는다. 깃발을 "꽂는" 것과, 흔들며 뛰어다니거나 몸에 두르는 것은 전혀 다른 뉘앙스를 갖게 되는 것이다. 몸은 (대개의 경우) 고유의 국적을 갖기 때문이다. 즉, 개인은 대사관처럼, 어느 나라를 가던 침해받지 않는 특정 국가의 '영토'이다. 하지만, 스타디움에 국기를 꽂으면, 마치 스타디움 전체가 한국 대사관이 된 것 같아 보인다. 마치, 한국 선수들이 상대편 선수들을 경기장에서 내쫓아도 문제될 게 없어 보이는 상황.
단순히 스포츠의 흥분과 감동을 고조시키는데에 쓰인 작은 도구로써의 태극기에다가 공연히 많은 뜻을 실어 불편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태극기를 보고 울컥하는 부류들 역시 태극기에 "팀 로고"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혹은, 아직 내 자신이 과거를 추억하지 않고 태극기를 대할 수 없는 세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겨레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거의 마지막 세대. 태극기는 엄숙하고 경외할 물건이라는 잠재의식 때문일까.
이번 WBC에서도 베이징올림픽처럼 좋은 성적을 내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또 태극기가 "꽂히"면, 나는 또 불편해 할 것이다. 다른 세리머니 방식을 찾아내 알려주고 싶다. 1박2일에서처럼 한국 야구장의 흙을 가져가 마운드에 뿌리면 어떨까. 한국의 실력으로 세계야구의 수준이 조금 높아졌다는 의미로.(마운드의 높이가 약간 높아질테니까) 차라리 WBC의 승인하에 마운드 아래 타임캡슐을 심는다던지 하는것도 좋겠다. 한국팀들이 하고 있는 목걸이, 그건 딱 그런 용도에 좋을 것 같다.^^ 선수 한 명당 너댓올씩 빼서 말이지. 선배 야구인들의 노고를 기리는 뜻으로 마운드에서 약식 제사를 하는건 어떨까? 왜? 한국적이지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