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를 힘겹게 끝낸 후 컨디션을 추스르고 있었을 때야.
마냥 슬픈 시기였지. 번아웃과, 삶의 불안감이 겹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10여 년의 경력이 아깝기는 하지만 - 새로운 일을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빠르면 3년, 길어야 10년 주기로 개편되는 이 분야의 특성, 즉, 물성 없이 금방 휘발되는 이 일이 과연 의미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껏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상실감과 회의에 빠져 있던 때였어.
그러던 어느 날, 옆 팀이 눈에 들어왔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거든.
새 프로젝트를 맡은 모양인데, 갓 책임을 단 시니어 한 명과 주니어 세 명으로 구성된 디자인 TF는 이미 충분히 지쳐 보였어. 일주일 동안 새벽까지 일한 모양인데, 전혀 진도를 빼지 못했나봐. 보통 새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본격적으로 시안을 잡기 시작하면, 빠르게는 일주일 내에 초안을 완료하고, 늦더라도 일주일 정도면 방향이라도 세팅되어야 하는데, 너무 늦은 거지.
처음엔 그냥 지켜보려 했어.
내 상태도 상태였지만, 도와주려는 게 어찌 보면 오지랖이고, 나와 그렇게 살갑지는 않은 친구들이었기에 “뭐 잘 하겠지, 못하는 애들도 아닌데”라며 그냥 관망했어.
하지만 다음 날, 퇴근하려 하는데 그 애들이 눈에 밟혔어. 어제도 꼬박 샌 것 같은데, 오늘도 야근 준비를 하는 걸 보니 마음이 흔들리더라구.
“오늘도 밤새요?”
“네”
“도와주까요?”
“ㅎㅎ 괜찮아요”
“... 뭐 하면 돼요? ^^”
회사에선 땡큐였지. 내가 중앙일보를 막 끝내고 온지라, 회사에서도 나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좋은 말로는, 배려를 해 주고 있었는데) 손을 돕겠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
복합적인 감정이었던 거 같아.
이렇게 마냥 쳐져있으면 안돼.
또는, 우리 세대가 잘했더라면 저 아이들이 저렇게 고생 안 해도 되었을 텐데.
또는, 뭐라도 해야 미치지 않을 것 같아.
또는...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인데, 엉뚱한 곳을 긁고 있으니 보기 답답해서.
오후 8시에 착수해서 새벽 4시까지 시안을 잡고, 아침 6시까지 제안서에 들어갈 전략문서와 가이드를 작성했어.
원래 내가 해주기로 한 부분은 코웨이의 글로벌 사이트 시안이었지만, 내 디자인은 국내 사이트 개편의 기본형으로까지 확장되었고, 전반적인 코웨이 개편의 틀이 되었어. 하지만, 국내 사이트는 워낙 제약사항이 많아서, 새로운 브랜딩도, 새로운 GUI 가이드도 크게 정돈되진 못했어.
이 프로젝트를 내가 했다고 말하긴 좀 그래.
그냥 하루 도와준 것뿐이라서, 두세 달간 구축하느라 고생한 애들이 있는데, 내가 했다고 말할 순 없지. 하지만 코웨이 개편 프로젝트는 내게 나름의 의미가 있어.
재활운동이 몸을 살리는 것처럼, 심신이 지쳐있던 내게 동기부여를 해 준 작업이었고, 시야와 역량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고 봐.
혹시 모르지,
이 프로젝트가 없었더라면, 지금 나는 다른 일을 설레는 마음으로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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