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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 of UX

ZEN of UX. 31 - 어디로 가든 길은 있으니까

ARTBRAIN 2026. 5. 6. 17:18

디자인 업을 하면서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는 ”어디로 가든 길은 있다”라는 말이야. 미리 답을 찾은 후에 그곳으로 가려하지 말고, 일단 시작하면 그쪽으로 난 길이 자연스럽게 너를 유도하리라는 게 내 기본적인 일의 태도거든. 실제로 나는, 어떤 방향으로 디자인을 하든 일정 수준 이상의 답은 항상 여러 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즉, 디자인의 정확한 답은 물론 정해져 있지만 다른 여러 답도 충분히 possible 하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기대보다 더 큰 가치를 얻을 수도 있다는 거지. 나랑 일해 본 사람 중에서 내가 이 말하는 것 안 들어본 사람 없을걸?

이를 모식적으로 그리면 위와 같아.

결과물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정확하고(옳고?) 맥락과 목적에 맞는 정합성을 갖는 Suitable, 정답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적절하고 성립 가능한 결과물인 Possible, 뭔가 결함이 있더라도 사용하는 데에 무리가 없고 일단 진행은 가능한 범위를 Workable이라고 나눌 수 있어. 그리고, (나는 매우 좁은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No 영역. 이건 생뚱맞거나 충돌하거나 무의미한 방향을 말해. 뒤에 보다 간략하게 말하기 위해 다음처럼 약어를 쓸게. S-P-W 그리고 N.

정말 많은 디자이너들이 S를 명확히 찾고 높은 성취를 이루는 것을 디자이너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아. 당연히 맞는 태도이지만, 오히려 그 점이 역량 있는 디자이너의 기복을 만든다고 생각해. 유연하지 않은 전문성은 배타적이 되기 쉽고, 그런 방식으로 일하다가 업무 내에서 길을 잃으면 엉뚱한 곳에 집을 짓거나 턱 괴고 핀터레스트 스크롤하는 행위를 반복하게 되는 거지.

그래서 나는 항상 “어디로 가든 길은 있다”라는 말을 통해서 그 디자이너를 위로하고 그 강박불안을 조금이라도 없애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하지만 이게 마냥 ‘위로’만은 아닌 것이 - 이 개념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독불장군이 되거나 피해망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지. 조금 더 설명해 볼까?

(1) 독불장군 디자이너 A의 유형 : 그는 답답하다. 내가 없으면 일이 안돌아간다니까. 왜 다들 일을 대충 하려고 하는 걸까? 조금만 살펴보면 답이 나오는데, 왜 꼭 애매한 곳에서 타협을 하려는 걸까? … 그래, 맞아. 네가 제안한 그 방식도 안 되는 건 아닌데… 저쪽에 고지가 분명히 손짓하는데, 왜 엉뚱한 쪽으로 가려는 거야?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갈아엎자고! 한 번 하면 다음부턴 편할 거라니까? 아니야? 그럼 이 문제에 대해서 일을 올스톱하고 전사적인 회의를 하는 건 어때?

(2) 피해망상 디자이너 B의 유형 : 이 회사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해 본 기억이 없어. 여기저기서 안된대. 시간도 안 줘. 어차피 이번도 적당한 거 찾아서 주면 되겠지 뭐. 왜 나만 열심히 해야 해? 내가 열심히 해도 뭐 하나 이룬 게 있어? 이 회사에서 한 작업 중에 포폴에 쓸 건 하나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뭐 하나 제대로 하려면 좋은 동료나 적절한 시간, 좋은 방향성, 그 셋 중 하나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맞는 말이긴 한데, 실제로 대부분의 일은 그런 상태가 아니지 않나? ^^) 응? 왜 이렇게 했냐고? 저번에도 기어이 옛날 걸로 롤백하고서야 일이 끝났잖아. 몰라몰라, 내 탓 하지마. 너희가 초래한 일이야. 난 굳이 여기에 더 힘빼기 싫어. 


어때, 대충 내 의견이 뭔지 감이 와?

대부분의 일은 S를 찾아야 하는 일이 아니고, 일의 경중에 따라, 일정에 따라, 목표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답 중 하나를 찾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해. 어떤 상황에서든 S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맞지만, 좋은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답을 찾는 게 우리의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역량에 따라 “이 일을 내가 S영역까지 끌고갈 수 있을까”하는 메타인지가 선행되지 않으면 일이 힘들어지게 돼.

답은 하나가 아니라 수십 수백개야. (나는 또한 답이 없다고 힘들어하는 디자이너에게 “길은 백만 가지가 있어. 네가 그 모든 경우를 못 보는 것뿐이지”라고 면박을 주는 나쁜 버릇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쏘리 에브리원.) 

심지어, 각각의 영역에서 고도화하면 더 나은 답을 찾을 수도 있어. 똑같은 시간에 더 높이 올라갈 기회가 생기는 거야. 이건 영역과 관계없어. '천 개의 고원' 같은 거야. 오히려 W 쪽에서 높게 쌓은 것이 더 가치있을수도 있어. S영역은, 일단 진입하기만 하면 높은 탑을 쌓기는 쉽겠지. 막 스스로 높게 올라갈 거야. 하지만 P와 W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이 쌓기가 어려울 테니, S영역에는 높은 탑이 많을테고, W쪽에는 한두 개가 있겠지. 그런데.. W쪽에서 매우 높게 쌓은 탑은, 새로운 S영역을 만들어내기도 해. (N영역에서 만들어지는 컬트도 있기는 하지.^^)

내가 생각하는 N영역의 컬트 - 뉴모피즘. 여전히 내가 보지 못하는 가능성일까?

 


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기본 태도는 S영역을 지향하는 게 답이기는 해. 하지만 더 세련된 방법은, S영역 밖으로도 눈을 열어두고 다른 가능성들, 새롭고 낯선 답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건 개인의 경험을 넓혀 주는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일을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하는 방법이기도 해. S로 달려가되, 과정 중에 적절한 P나 W가 있으면, 그쪽에 눌러앉을 것도 고려하라는 거지. P 안에 적당히 들어왔으면 바로 위로 쌓아봐도 좋아. 시간이 없거나 특이하게 자신을 끄는 게 있다면 다소 무모하더라도 W영역에서 쌓아도 돼.

그런데 많은 디자이너들이 S로의 방향설정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써. 아냐. 일단 자리 잡고 쌓아.

그런데.

이 말이 독으로 작용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 이 근본적인 고민도 하지 않는 유형인 (3) 디자이너 C의 경우 : 자신의 생각의 위치가 어딘지도 고려하지 않고 일단 쌓는 경우야. 전형적인 핀터레스트 스크롤러. 어 이쁘네. 요걸로 가자. 어 저것도 이쁘네, 저걸로 할까? 일단 저장. 저것도 저장. 어, 이거 옛날에 찾았던 거랑 비슷하네? 그 때 찾아둔 게 어디있더라... 

높이도 추구하지 않아. 일단 한두 칸 쌓고, 그 옆에 또 한두 칸 쌓고, 어제의 일은 과거의 내가 한 것, 오늘의 일은 어제의 내 일과는 관계없는 것. 본인에게도 쌓이지 않아. 그런 유형의 디자이너에게 나는 이렇게 가이드하는 편이야 : 음, 여기서 쌓아보세요. 요렇게 쌓으면 돼요. 일단 쌓아봐요. 쌓을 때마다 말씀해 주세요. 아 쌓는 게 뭐냐구요? 쌓는다는 건요… 응? ... 에이, 이건 저번에도 보여주신 핀터레스트 이미지잖아요.


PS. 디자이너 마음 속에는 대개 이런 그림이 있다는 거 알아. 찬란하고 아름다운 정상이 있긴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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