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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다이얼로그 3 (Lamy Dialog 3) 리뷰

Curious ARTBRAIN 2020. 12. 6. 00:14

블랙 프라이데이라 펜을 하나 질렀어. 라미 다이얼로그 3.


직구를 할 땐 보통 200불 안쪽으로 하는 편이야. 혹시나 과세 관련으로 문제가 생길까 싶기도 하고, 관세가 붙지 않더라도 배송 기간이 길어지게 마련이라서, 엄청나게 갖고 싶은 물건이 아니고서는 200불 이상으로 구매하지 않아. (사실 내가 직구하는 물건들은 관세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야. 저가의 전자제품이나 컴퓨터 액세서리, 사무용품류, 책 등은 사치품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관세 없이 부가가치세만 조금 적용되는 편이야. 책 같은 경우는 부가가치세도 전혀 붙지 않아. 만년필의 경우, 200불 이상이면 관세가 20%까지도 붙는다고들 하는데, 난 그렇게 큰 비율의 관세를 내 본 경험이 없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 펜은 무려 169.99불. 한화로 약 184,000원. 요즘 환율이 좋기도 하지만, 국내 최저가가 325,000원임을 감안하면 최소 14만원 가까이 싼 가격이야. 몇년 전만 해도 54~65만 원 선이었던 모델인데, 값이 떨어진 걸 감안하더라도 엄청나게 싸게 잘 산 것 같아. ^^ (값이 너무 싸서 DHL Express를 이용하는 사치를 부렸지 ㅋ. 그래도 22만 원. - 블프가 끝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 찾아보니 290불. ㅎㄷㄷ)

라미는 독일 브랜드지만, 고가의 라인업보다 보급형 모델이 유명해. 모르긴 해도, 라미는 사파리가 가장 많이 팔렸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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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제 제품에 대한 환상이 있잖아. 왜.

품질이 일정하고, 잘 망가지지 않고... 막 세련되고 근사하진 않더라도 일정 수준은 유지할 것 같은 느낌. 만년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파버카스텔, 펠리칸, 로트링, 스테들러... 정직하고 꾸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문구들은 거의 다 독일산이더라구. 이게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데, 장점이라면 뽑기와 상관없이 일정한 품질을 보장해 준다는 걸 테고, 단점이라면 개인의 취향과 습관에 맞춰 길들이기가 쉽지 않은 펜이라는 거지. (일례로 나는 파버-카스텔을 좋아하는데, 이 회사 제품은 중고든 신품이든 처음 보는 모델이든, 항상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유지하거든. 쓰기 전에 어떻게 나올지를 알 수 있을 정도지.)

라미 사파리를 써 본 사람이면 이 펜이 꽤 익숙할 거야. 라미 특유의 둥그스름한 느낌이 있어. 종이에 닿을 때 저항감도 적고 사각거리는 소리도 적지만, 파커 만년필처럼 뭉근하지 않고 볼펜처럼 흐르는 맛이 있어. 나쁘게 말하면 개성없음이지. 좋게 말하면 관용성이고. 그래서 사실 나는... 라미를 그다지 즐기지 않아. 항상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 주지만, 같은 값이면 새로움을 주는 펜을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잘 안 사게 되더라구.

14K 골드닙인데, 단차가 거의 없어. 도금인줄.


라미 만년필 중에서는 플래그십 모델이라, 당연히 사파리나 알스타보단 훨씬 좋아. 하지만, 그 "훨씬 좋음"이 - 여타 고급 만년필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하고 환상적인 경험"이 아니라 - 라미 사파리를 아주아주아주 잘 만든 듯한 느낌이랄까. ^^ 개성의 방향이 없이, 높은 수준으로 정밀함만 끌어올린 거지. 개성과 독특함을 중요시하는 내게는 조금 안 맞기도 해. 좀 더 예민했으면 좋겠는데, 예민함보다는 단단함의 끝 맛이 느껴져. 

다이얼로그 3의 독특함. 스크류 타입 - (c) Lamy Korea


하지만, 다이얼로그 3가 개성을 갖는 부분은 바로 이것, 공식 명칭은 '트위스트 슬라이딩 도어 오픈 방식'인데, 펜의 뒷부분을 돌리면 클립 뒤쪽에서 닙이 나오는 방식이야. 일반적인 명칭은 '리트랙터블 펜'이고.

실제로 보면 안쪽 돔형 금속판이 열리며 닙이 나오는데, 이거 꽤 근사해. ^^ 국회의사당 뚜껑이 열리며 태권 V가 나오는 느낌이야. 근데, 좀 걱정돼. 관리를 잘해야지 싶어. 특히 펜을 좀 힘주어 쓰는 사람들은 좀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좁은 부분에 메카니컬 한 장치를 사용한 것은 제조사의 자신감이겠지만, 만년필이라는 게 쓰다 보면 닙 주변으로 생채기도 생기고, 오래 쓰면서 피드가 넓어지면, 작은 충격에도 잉크가 안쪽에서 튈 텐데, 이 부분에 잉크가 굳거나 하면 참 성가실 것 같아. 혹시 사려는 사람들은 충격에 주의해야 할 것 같아. (초기 버전과는 달리, 현재 버전은 별도의 어댑터를 제공해서 금속 돔 부분을 청소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는데, 아무래도 여기를 청소하는 것 관련한 이슈 리포트가 많았던 탓이겠지.)

그리고, 비싼 모델의 경우가 다들 그렇듯, 좀 무거워. 공식적인 제원은 48g인데, 무게가 상당히 앞쪽에 쏠려 있어서 체감 무게는 50g 중후반대가 아닐까 해. *다이얼로그 3 구매를 앞두고 서치 하다가 이 글을 본 사람이라면, 이 부분이 중요하니 잘 생각해 봐.

대부분의 만년필이 캡을 뒤에 꽂아 쓰거나 캡을 빼고 쓰거나 하잖아. 그런데 이 펜은 캡이란 게 없는 만년필이란 말이지. 그래서 무게 중심이 좀 특이해. 

무게 중심이 괜찮아 보이지만, 엄지-중지 근처에 대부분의 무게가 있어.


사진으로만 보면 무게중심이 무난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야. 무게중심의 위치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위치에 따른 무게 변동이 극적으로 변하는 게 문제지. 그래서 다음과 같은 유형이라면, 반드시 시필을 해보고 구매하길 바라. 

(1) 닙에서 가깝게 펜을 잡는 사람 (2) 손이 작은 사람 (3) 글씨를 작게 쓰는 사람 (4) 펜을 45도 이상으로 세워 쓰는 사람들에게는 이 펜이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아. 모양은 무난하지만, 확실히 큰 글씨를 자율도 높게 휘갈기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펜이라고 봐.

개인적으로 나는 이 펜과 궁합이 나쁘지 않아. 펜도 좀 눕혀 쓰는 편이고, 옛날 미술 연필 잡던 버릇이 있어서 만년필도 누구보다 길게 잡거든. 닙의 종류와 관계없이 펜을 얹듯이, 힘 안주고 쓰는 타입이라서 이 펜의 의도와 잘 맞는 것 같아. 무게 중심과 그립 부분이 거의 일치하니까 상대적으로 펜 끝이 크게 움직일 수 있어서 - 작게 쓰기엔 부담스럽지만, 덕분에 모처럼 크게 휘날리는 필기를 하며 재밌게 놀고 있어.

참고로 내가 주로 쓰는 만년필 중에선 일제가 많아. 아무래도 학생 때 샤프를 주로 사용했던 경험 때문일 거야. 만년필도 조금 사각거리고, 얇게 나오는 게 편한게지. 아주 유연한 Flex 닙이 아니면, 애매한 연성 닙은 좀 위화감이 있고. 몽블랑처럼 묵직하지 않을 바에야, 밸런스 조절에 집착하는 일제가 선택 폭이 넓기도 하고.

서구권 만년필로는 워터맨과 파버 카스텔을 선호하는데, 워터맨은 10만원 정도부터 꽤 괜찮은 퀄리티를 보여주는데다,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편이고, 파버 카스텔은 길들이긴 어렵지만, 파버 카스텔의 디폴트가 내 일반적인 선호와 가장 유사한 편이라서 좋아해. 디자인을 기준으로 펜을 살 때는 카웨코나 비스콘티를 좋아하는데, 카웨코는 닙의 품질은 중상인데, 가벼운 펜은 지나치게 가벼운 단점이 있고, 비스콘티는 오직 곡선의 클립이 매력적이라 사는 편이지.

이런 성향을 기준으로 다이얼로그 3에 별점을 준다면 3.5 정도 될 것 같아. (평균 직구가격인 30만원 중반일 경우)

프리미엄 모델이라는 건 확실하게 느껴지는 퀄리티고, 창의적인 부분(리트랙터블 펜)도 구매가치가 있다고 봐. 많은 사용자들에게 호평을 받을 모델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적응할 만한 사용성인 거 같아. 하지만, 확실히 노멀한 밸런스는 아니고,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할 까다로운 구조는 이 펜의 마이너스 요소라고 봐. 

그리고, 이 펜의 가격대 - 30만원 중반에서 40만원 후반까지 - 라면, 살 수 있는 좋은 펜이 세상에는 너무 많아. 아직 국내에서는 45만원에서 65만원까지 파는 곳이 있는데, 그 가격이라면 굳이 이 펜을 사야할까 싶고. ^^ (65만원이면 몽블랑 146도 살 수 있는데!!) 30만원대라면 직구로 세일러 쓸만한 거, 오로라 괜찮은 것과 이 펜 사이에서 고민 좀 했을 거 같아. 혹시 리트랙터블 펜 자체에 호기심이 있다면 파일로트의 Vanishing Point (일본명 : Pilot Capless) 먼저 사 보기를 권해. 일본 직구라면 배송비 포함해서 10만원 넘지 않게 살 수 있거든.

암튼, 모처럼 재밌는 만년필 자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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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만년필 동호인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당근펜을 소개해. 다이소에서 2천원에 살 수 있는 대륙의 실수. ^^


파일로트 카쿠노를 8천원 이하로 살 수 없다면, 이 펜의 가성비는 세계 최고라고 봐. 펜의 디자인을 감수할 수 있다면, 웬만한 브랜드의 저가형 모델은 충분히 압도할 만큼의 필기감을 줘.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