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만년필을 써 오면서 '필감은 가격과 비례한다'는 걸 체감했던지라, 한 번도 중국제 만년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어. 유명 모델을 카피한데다 너무 싼 가격이라 믿을만하지 않았거든. 이천 원 내외의 가격이 상식적인 수준이 아니잖아.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 베스트펜에서 잉크를 사면서, 4500원짜리 진하오가 있길래 함께 주문했어. 알리에서 구하면 2000원 정도 선에서 살 수 있지만, 너무 싸니까 두 배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더라고. ^^
모델명은 진하오 스페셜리스트, F촉. 그레이 색상이야.
사진이 어둡게 나왔는데, 실제로는 약간 어두운 중간 회색이야. 사진에 있는 세일러도 작은 펜이지만, 이것도 거의 같은 급의 크기이고, 시가형이라서 길이는 약간 더 길어. 배럴의 두께도 비슷하고.
엇, 펜촉 이쁜데? 적당히 잘 말려 있고 세공도 우수한 편.
솔직히 좀 현타가 왔어. 그동안 난 왜 비싼 펜을 사 온 거지? 이 가격으로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면, 왜 그동안 열배, 백배 가격으로 펜을 사 온 걸까? ^^
이 펜은 - 소위 '버터필감'이라고 하는 걸 확실히 보여주고 있어. 이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보다도 더 현타가 올 것 같아. 어떻게 4500원짜리 펜에서 이런 감촉이 나오지? 그냥 팁만 두껍고 크게 만들면 되는 게 아닐 텐데?
하지만, 필감이란 게 - 여러 개의 요소가 섞이며 종합적으로 느껴지는 거잖아. 그립감, 무게, 밸런스, 닙의 경도, 배럴의 감촉, 바디의 길이, 잉크의 흐름 등을 종합한 게 필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펜은 필감이란 걸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느낌 하나로만 정의하고 그 방향으로만 몰두한 것 같아.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버터 필감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분명한 데피니션(?)이 있는 펜을 좋아하는데, 이 펜은 약간 수성펜 느낌이야. 제법 낭창해서 OMR 싸인펜 질감같아. 아니, 볼펜이 미끄러지는 느낌 정도로 좀 과하다 싶어. (이 정도면 왜 만년필을 쓰나 싶을 정도)
갖고 있는 펜 중에 잉크가 들어 있는 모델들과 비교를 해 봤어. 전부 F인데 두께 차이가 상당하지? 이건 펠리칸이 얇게 나오는 거고, 오퍼스88이 가장 기준이 되는 F일 거야. 보면 알겠지만, 진하오는 잉크의 농담이 심하게 드러나. 이런 농담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이게 좀 거슬리거든. 흐름이 너무 좋은 것도 한몫하는 거 같아. 흐름이 너무 좋아. 좋다 못해 흘러. 캡을 닫고 잠깐 이동했는데, 캡 안에 잉크가 튀어 있어. 흐름을 지나치게 좋게 만들려다 보니 닙마름은 신경 쓰지 못한 거 같아.
마감에 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아. 얼핏 보면 나무랄 데 없거든? 그런데 약간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아. 그런데 쓰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까 패스. (보관할 때 항상 보이는 저 바디 끝의 볼 마감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
좀 더 써봐야 하겠지만, 커피값도 안되는 가격으로 이 정도의 품질을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아.
하지만 오래 쓰는 건 - 솔직히 기대하지 않고 있어. 가장 큰 불만은 잉크 흐름. 잉크가 너무 튀어서 금방 지저분해지고 관리도 어려울 것 같아. 아마 닙마름도 상당하겠지. 마감의 엉성함은... 쓸 때는 모르겠지만, 계속 눈에 밟히게 마련이고. ^^
무엇보다도, 창작자의 한 명으로써, 이런 모조품을 '가성비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쓰는 건 아닌 것 같아. 이 형태가 워낙 일반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짝퉁은 짝퉁이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파일롯트나 세일러 등 일제는 모두 카피로 시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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