ときめ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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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 단상 : 내가 뭐라고 당신에게 불합격을 주는가.

ARTBRAIN 2022. 3. 21. 03:39

1.

전 회사를 퇴사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맥북을 샀다. 내 기준엔 엄청난 지출. 8년 된 맥북에어가 오래되기도 했고, 경력이 늘어나면서 뭔가 정체된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새로이 각오를 다지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 세계관과 맞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이 M1 맥북프로는, 내게로 와서 고작 유튜브 플레이어가 되었다. 

처음엔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고 Cinema 4D, Blender, Framer 등 여러 가지를 설치했지만, 기초적인 내용을 배우고 나니 흥미가 뚝 떨어져서 거의 켜지 않는다. 젊었을 땐 플래시 스크립트를 이틀 만에 파악했었는데, 지금 내게는 그런 열정과 체력이 없다. 

게다가 내가 주로 쓰는 프로그램들은 그다지 무겁지 않다. 훨씬 저사양의 컴퓨터에서도 쌩쌩 돌아가는 프로그램들이다. 애플 디스플레이에 들어간다는 A13 정도만 넣어서 '맥북 라이트'를 출시해 준다면 좋았을 텐데... 기왕에 사는 것 좋은 걸로 사자는 마음에 '머슴집에 가야금'을 들였다.

그래서 맥북을 쓸 때마다 미안한 감정이 든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 가면 못할 게 없는 장비인데, 내게로 와서 고작 유튜브나 돌리고 있다니. (그래도 꾸역꾸역 뭔가를 하기는 한다. 성에 차지 않아서 그렇지. - - ;)

2.

새 회사에 입사한 지 세 달이 다 되어간다. 생각과는 다른 회사지만, 일단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인력이 너무 부족하여 채용을 서두르고 있지만,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다 괜찮은 인재가 나타나더라도 다른 회사에 붙어서 면접을 취소하겠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러는 사이, 내가 불합격을 준 사람이 50명을 넘어섰다. 고작 한 달 사이에.

예전에 다니던 회사들처럼 '괜찮은 사람은 모두 뽑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서 일단 신입은 거른다. 재능이 있어 보여도, 회사에 신입 T/O가 없으니 뽑을 수 없다. 능력이 출중한 경력자들도 각자의 이유로 인해서 불합격을 줄 수밖에 없다. UX 개념이 좋지만 그래픽이 아쉬운 사람, 스타일이나 트렌드를 이해하지만 구조와 설계에 대한 이해가 적은 사람, 경험은 많지만 좁은 영역에서만 활동했던 - 이른바 'I형' 인재도 뽑을 수 없었다. 모든 게 우수하더라도, 회사가 내세우는 가치와 너무나 결이 달라서 아쉽게도 거절해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나 대신 이 회사의 디자인을 책임져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그분은 회사가 거절)

내가 눈이 높은가? 아니다. 이 회사에 적합한 인재를 만나는 게 쉽지 않을 뿐이다. Mike Matas가 은퇴를 번복하더라도 - 연봉이나 업무 범위가 맞지 않으면 모시고 올 수 없지 않은가.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나는 인력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지만 - 마음과는 다르게 계속 불합격을 주고 있으며, 그들 모두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불합격 공지를 상세하게 써 주려고 몇십 분을 바라보다가, 그냥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기본 양식으로 통지한다. '즉시 통지'를 누르지도 못하고 '1일 후, 15시에 알림'이라는 옵션을 선택하고 엔터를 누른다. 점심 먹고 여유로운 시간에 불합격 통지를 받으면 충격이 조금 덜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3. 

채용은 입시와 다르게 정량적이지도 않고, 선형적이지도 않다. 채용은 매우 복잡하고 부조리하다.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좋은 회사에 좋은 연봉으로 채용될 확률이 높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에 회사는 "우수한" 인재보다 "적합한" 인재를 찾는다. 모든 조직은 불완전하고, 자기 나름의 합리성으로 조직의 필요를 파악한다. 

따라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당신의 가치와 불합격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차피 그대들 중 대부분은 여러 회사에 지원을 했겠지만, 내 관점에선 낯선 이의 미래를 몇 분만에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므로, 내가 아무리 집중하더라도 당신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내가 당신을 파악하기 위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일주일 동안 들여다 보고, 다면적인 뒷조사를 한들 어찌 당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겠는가.

4.

또한, 나 역시 근로자로서, 선택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채용된 것은 나의 불완전한 탐색과 회사의 불완전한 모색의 교집합일 뿐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 회사의 가치와 나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다. 나도 당신도 - 그렇게 작은 가치의 사람이 아니리라 확신한다.

5. 

내 맥북도 이런 생각을 하겠지 - ©배가본드


내 맥북은 불행하게도, 그 수많은 테크니션의 선택을 피해서 내게로 왔다. 값을 치렀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누군가는 이 맥북으로 우주의 진리를 발견할 수도 있었을 테고, 누군가는 세기를 정의할 만큼 대단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으리라.

6.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채용은 애초에 부조리한 것인데. 어느 미래에는 당신이 나를 채용할 수도 있고, 확률이 낮지도 않다. 당신이 나를 떨어뜨릴 때가 오면, 나처럼 약간의 미안함을 가지길 바란다. 그냥 그렇게 부조리한 세상을 함께 살아내면 좋겠다. 내가 '불합격' 버튼을 누르는 것이, 부디 그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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