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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과 달 — 잘못된 리딩에 대처하는 자세

Curious ARTBRAIN 2021. 4. 12. 18:46
옛날 어느 나라에 어린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는 왕과 왕비의 사랑을 받으며 아름답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어느 날 하늘 높이 떠 있는 금빛 달을 보고 불현듯 그 달을 가지고 싶다며 부모님께 달을 따달라고 보챘다. 왕과 왕비는 공주에게 달은 따올 수 없다고 타일렀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보채는 공주. 왕은 덕망 있고 실력 있는 학자들을 불러 공주를 설득해 보았다.

"공주님, 달은 아주 멀리 있습니다. 달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없습니다. 설사 달이 있는 곳까지 간다 하더라도 따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도 소용 없었다. 공주는 달을 따다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식사를 하지 않고 굶기 시작했다. 이때, 공주와 친하게 지내던 광대가 나타나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님, 달은 어떻게 생겼나요?"
"달은 동그랗게 생겼지 뭐."
"그러면 달은 얼마나 큰가요?"
"바보, 그것도 몰라? 달은 내 손톱만 하지. 손톱으로 가려지잖아."
"그럼 달은 어떤 색인가요?" 
"달이야 황금빛이 나지."
"알겠어요, 공주님. 제가 가서 달을 따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광대는 공주가 말한 대로 손톱만한 크기의 동그란 황금빛 구슬을 만들어 공주에게 가져다주었다. 공주는 '달'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하지만 광대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달을 따왔는데, 오늘 밤 보름달이 뜨면 공주가 뭐라고 할까 염려가 되어 광대가 공주에게 말을 건넸다. 

"공주님, 달을 따왔는데 또 달이 뜨면 어떻게 하지요?"
"이런 바보, 그것을 왜 걱정해. 이를 빼면 새 이가 또 나오지? 그것과 같은 거야. 달은 하나를 빼오면 또 나오게 되어 있어. 그리고 달이 어디 하나만 있니? 달은 호수에도 떠 있지, 물컵에도 떠 있고, 세상천지에 가득 차 있어. 하나쯤 떼 온다고 문제될 게 없지"

광대는 공주와 함께 빙그레 웃었다.

— 박성희 교수의 '동화로 열어가는 상담 이야기'. 학지사 출판, 2007


흔히 카운셀링 교보재로 사용되는 이야기야. 공감과 소통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주 쓰이지. 

업무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하늘에 떠 있는 '진짜 달'을 목표로 삼고 일하던 사람들은, 공주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멘붕에 빠질거야. 우리가 완수해야 하는 목표가 고작 '황금빛 구슬'일 뿐이었다면. 그동안 행성간 거리나 로켓 추진체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던 학자들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었던 거잖아. 동네 금은방에서 몇 푼 들여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천체물리학자와 엔지니어 수십명을 동원해서 진행했다면 매몰비용도 엄청나겠지.

물론, 이런 에러는 없어야 해. 공주님이나 할 법한 실수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 에러가 일어났다면 그 뒤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소통을 잘하자거나 공감이 중요하다거나 하는 1차적인 교훈은 누구나 알지. 하지만 내가 관심있는 건 그 뒤 문제야.)

흔히 저지르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 목표가 애초에 잘못 설정되었으니 '진짜 달'을 따오는 걸로 재정비하자는 것. 가짜 달은 잘못된 방향이었으니까 잊고, 정통성이 있는 진짜 달을 따오기 위해 매진하자는 생각. 이거, 이야기로 들으면 이렇게 고집부리는 게 어리석어 보이지만, 실무에서 만날 때는 이처럼 간단하지 않아. 오히려 공주가 생각한 '황금빛 구슬' 모델을 파기하는 게 더 쉬워 보이지. 

동화에서 보듯, 달이 실물인지 모사품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은유이긴 하지만, 공주에겐 인사이트가 있잖아. '달은 어디에나 있다.' - 이걸 캐치하는 게 중요하지. 이 이야기의 끝은 공주의 행복도, 공주의 혜안을 이끌어낸 광대의 멋진 질문도 아니라, 여러 달이 있는 세계에서 전개되는 다음 이야기가 되어야 해. (이 이야기의 영어판 제목이 many moons인 건 꽤 인상깊은 부분이야.)

이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서는 공주님이 '황금빛 구슬'로 목걸이를 만들고 싶어했어. 사업이 원하는 것이 목걸이라는 걸 아는 게 중수라면, 달의 다양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연구하는 게 고수겠지. 하수는 물론, 진짜 달에 애착을 두고 고집부리는 학자들일테고.

* 물론! 학자들의 잘못이 아냐! 가장 피해를 입은 쪽이지. 이 이야기에서는 공주가 달을 따오랬다고 천문학자를 불러 온 왕과 왕비의 잘못이 제일 크겠지. 왕정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이라면, 왕과 왕비는 학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게 맞고.

내 결론은 다음과 같아.

사업의 방향을 잡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고, 헛다리 짚을 수도 있어. 하지만 한 곳에 머물러 뱅뱅 도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신속하게, 멈추지 않고, 주어진 범위 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야 해. 너무 큰 피벗이 필요한 경우는 이탈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는 사고방식이 중요한 것 같아. 실제로도 그렇고.

* 이건 애자일 프로세스의 장점이기도 한데 - 하위에서 애자일하게 움직이는 경우는 많이 봤어도, 전사적으로 유연하게 움직이는 건 흔하지 않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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