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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돌아보기 : KBS - 용두사미라고 말하긴 아쉽지만 (05)

각자의 창의성을 발휘해 달라고 요청하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15명(+ KBS 미디어 직원 n명)의 디자이너에게 더 상세한 지시가 필요했던 것 같아. 워낙 외부인들(사업주체, 개발 및 코딩파드 등)에 대한 대응이 중요했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을 세밀하게 드라이브하지 못했던 것 같아. 가이드를 중심으로 진행하던 이들에게 갑자기 창의력 중심의 작업을 지시하는 게 무리이기도 했고.

 

규칙에 의해 성실히 작업했지만, 이런 걸 기대했던 게 아니었지. 명확하게 내 잘못이야 - @KBS, rightbrain

 

디자이너라는 사람들은, 원래 쉽게 방향 전환이 안돼. 아무리 탑-다운으로 '이제부터 놀아보자!'라고 해도, 몸이 풀리고 예열이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가이드를 정리할 때의 분석적인 뇌 상태 그대로 창의적인 업무로 피벗할 수 있는 디자이너는, 아마 전체 디자이너의 3% 이내일 거야. (디자이너가 야근을 많이 하는 이유이기도 해. 예열의 시간)

 

모드 전환은, 농구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야. - @Slamdunk

 

이전에서도 기술했듯이 이 프로젝트의 방향은, 업무를 이어받을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틀을 만들어 주는 것이니까, 우리 TF에서 창의력이 나오지 않는 건 (프로젝트 입장에서는) 큰 문제는 아니었어. 우리 주니어들이 일상적인 페이지를 쉽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한 결과이긴 해. 가이드가 쓰기 쉽다는 얘기잖아. 

하지만, 우리가 성공적으로 가이드를 넘겼을 때, 그들이 창의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느냐에는 회의적이 되었지. 내부에서도 쉽게 창의력 모드로 전환하지 못하는데, 그들이라고 쉽겠어. 게다가 우리가 아무리 가이드를 배포하고 기준을 세워도, 넘겨받는 쪽의 파워가 없으면 금방 '사내 을(乙)'이 될 거잖아. 을이 되는 걸 막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부서에게 권한을 줄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이건 행정의 문제잖아.

어찌됐건 - 디자인 가이드는 일단락되었고, 이제 후반작업 모드로 전환. 또 다시 문서의 무덤.

 

이런 문서만 약... 40개?

 

 

이제 가이드를 배포하고 나니, 각 부서에서 요청하는 내용이 쏟아지기 시작했어. 

"뉴스는 상황이 좀 다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플레이어에는 이러이러한 기능이 들어가야 해요."
"하라는 대로 코딩했는데, 왜요?"
"어느 버전이 최종이에요?"
"오래된 컨텐츠는 형식도 다르고 자료도 빈약한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죠?"
"이 api를 정책 때문에 쓸 수 없대요."

뭐, 끝이 없더라고.

디자인 입장에선 제일 중요한 게 퍼블리싱 교정이이었지만, 교정을 살필 시간이 없었어. 디자인 교정보다 더 중요한 건 - 많이 남지 않은 기간동안 충분히 피드백을 주어서 가이드를 제대로 정착시키는 것이었으니까. 각 부서가 충분히 '가이드 기반 디자인'을 익혀야, 부서간 소통이 없더라도 서로 결을 맞출 수 있을 거잖아. 맘 같아서는 디자인 담당자끼리 정례적인 미팅이라도 만들었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개성이 없는 디자인인 만큼 pixel-correct 퍼블리싱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딴 건 다 모르겠고, 이 프로젝트 중 제일 아쉬운 게 바로 퍼블리싱의 정확도야.

 


5월 하순에 가이드와 주요 페이지 디자인이 배포되었고, 6월 부터는 퍼블리싱, 개발, 컨텐츠 기획, 각 부서 담당자로부터의 피드백 대응이 주 업무가 되었지. 우리 TF의 70% 정도는 상세 페이지를 추가 생산해야 했고, 가이드를 제작한 주요 인력은 - 쏟아지는 질문과 예외적인 업무환경 대응을 하면서, "이렇게 방대한 양의 가이드를 주었어도 모든 상황을 케어하지는 못하는 구나"를 느꼈어.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지. 외부에서 보기에는 상식의 범위 안에서 조정이 가능한 것도, 실제로는 행정적인 장애(라기 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운영되면서 고착화한 관행)들 때문에 쉽게 변경할 수 있는 상황이 많았어. 아래와 같은 질문들은 내부적으로 계속 나왔지만,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뉴스 파트에서는 이렇다고 하는데, 헬스 쪽에서는 아니라는데요?"
"요 내용은 중복되는데 - 두 부서에서 따로 작업하는 거에요? 똑같은 건데?"
"프로그램 섬네일을 원형으로 하고 싶대요. 또 설득하러 가야할 것 같아요."
"이 데이터 날린대요? 반발이 있을텐데? 이거 새로 세팅해도 된대요?"
"그 포맷 안쓴대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
"퍼블리싱 일정 안되서 거기까진 손 못댄다고 하네요."
"이거 다음 분기에 진행한대요, 스톱!"

 

두 달 정도 이런 질문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끊겼어. 계약 일정에 따라 기획파트에서 놀라운 속도로 업무 Freezing을 뿌린 덕분에 8월 즈음에는 조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생겼지. 8개월간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나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기도 했고, 내부 사정을 알게 될 수록 우리 스스로 trade-off하게 되어 업무 효율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거든. 끊을 시점이었어. 무식하게 뒷심을 발휘할 수도 있었겠지만, 들이는 에너지보다 변경되는 양은 미미하기 때문에, 내 스스로도 (계약을 연장하는 것에) 회의적이었고.

 

헛헛한 내 마음이 담긴 당시의 사진, 여의도 KBS 본사에서. 2017.7

 

당시 나는 회의와 협상이 주 업무였기에, 여의도 KBS 본사로 출근했었고, 계약 완료인 8월 말쯤에는 거의 자연인처럼 지냈어. 업무 마무리는 본사에 있는 팀원들이 정리하고, 내 업무는 거의 해결했으니까. 덕분에 난 보름 정도 KBS 내부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지냈지. 어슬렁거렸다기 보단 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재밌는 일도 좀 있었는데, 류수영 배우에게 라이터를 빌려주기도 하고, 처음보는 KBS 직원과 2시간 동안 토론하기도 하고, 모퉁이를 지날 때 우주소녀 멤버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성소가 어깨빵함, 드라마 같은 상황이었지만 현실은 ㅠㅠ)

 

여담이지만, 연예인들이 유난히(!) 나한테 인사를 잘했어. KBS 직원들이 '얼굴이 피디상(象)이신가봐요'라고 놀리고. ^^

 

 

8월 말에 복귀를 했지만, 프로젝트는 런칭되지 않았어. 개발 이슈이기도 하고, 거대한 데이터 이관에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지. 그 뒤로도 도 서너번 자문 비슷하게 미팅을 하기는 했지만, 프로젝트는 점점 더 내게서 멀어져 갔지.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부터는 아예 잊게 되더라고.

그리고, 다음해 8월. 딱 1년이 지난 어느 날. 

 

당시의 내 감상을 쓴 페북. 아쉬움 가득.

 

소리소문없이 오픈한 페이지를 보고, 아쉬움은 실망으로 바뀌었지.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한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리서치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의 절절한 피드백 ("나도 근사한 디자인을 하고 싶다구요!")을 받은 기억이 있어서 - 뭔가 탄탄한 정리를 했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마지막까지 전달했던 수정 피드백은 거의 고쳐지지 않았고, 열심히 디자이너에게 설명했던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채워 주세요) 것들은, 내가 손을 뗀 형태 그대로 있더군. 심지어 더미 이미지도 그대로 심어져 있고. 이게 뭐지? 디자인 잘하고 싶다며? 바꿔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할 땐 언제고, 직접할 수 있는 상황인데 하나도 안고쳤네? (디자이너든 기획자든, 본심은 오해하지 않아. 열심히 하고 싶었겠지.)

 

고쳐야 하는 부분은 그대로 두고, 가치있는 것들은 날려 버리고. 슬퍼 - @KBS

 


아아, 이게 한계구나 싶었어.

운영하는 중에 만나는 문제의 해결, 가이드의 보강 및 수정, 정기적인 업데이트... 요즘의 업무 표준은,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생물처럼 agile하게 대처하는 것인데, KBS는 우리의 디자인을 '결과'로 받아들였을 뿐, Tool을 손에 쥐어 준 걸로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

뭐 놀랄 일은 아니야. 10~15년 전에는 다들 그랬으니까. 적당히 낡았다 싶으면 리뉴얼하고, 싹 엎고. 옛날에는 웹/앱 디자인에 감가상각이 있었거든. 런칭한 직후부터 점점 낡아가는 거지. 낡는다는 것의 기준은 트렌드였고.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잖아.

Sustainability, 지속 가능성. 

내 노력이 쓸모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KBS의 미래에 꽤 쓸만한 도구를 전달했다고 봐. 하지만, 마음을 쓴 만큼 아쉬움이 크고.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 항상 말하는 거지만, 다음의 나는 더 잘할 테니까. 하하.

KBS 돌아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