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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에서 키보드를 사고 (1)

AliExpress에서 기계식 키보드를 하나 주문했다가 일주일째 고생하는 중.

집에서 글을 써볼까 해서, 로망이었던 기계식 키보드를 찾다가, 알리에서 희귀템을 우연히 찾고 주문했어. 알리답지 않게 빠른 배송. 9일 만에 물건을 받았고, 물건도 나쁘지 않아서 좋았는데... 키보드에 대해 궁금한 게 좀 있어서 본사(아이큐닉스 : 키보드 제조사)에 이것저것 묻다 보니, 내게 판매한 셀러가 본사로부터 승인받지 않은 불법 판매상임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일주일째 셀러와 실랑이 중이야. 

우체국 택배로 도착

 

알리는 오래전부터 짝퉁과 불법 유통으로 골치를 썩었던 쇼핑몰이라, 나름 분쟁 해결 정책을 디테일하게 정해두었는데, 절차는 다음과 같아 : 구매자가 환불이나 교환, 보상 등을 요청하는 걸 '분쟁 신청(Open Dispute)'이라고 하고, 신청한 때부터 5일동안 판매자와 구매자는 협상을 진행하게 돼. 그 기간 동안 합의가 되지 않으면 알리가 개입해서 판결(Judgement)하는 방식인데 - 이 전체 기간 동안 구매자와 판매자는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사진, 비디오 등의 증거를 수집하고 제시해야 해. 양측이 변호사가 되고 알리가 판사가 되는 셈이지. 

10월 29일 환불을 요청하는 분쟁 신청을 했고, 11월 3일 알리가 중재자로서 개입했어. 그리고 승패와 관계없이 분쟁은 무조건 11월 10일에 종료돼. 총 12일정도 소요되는데, 환불금 입금까지 포함하면 대략 한 달 정도 걸리나 봐.

저 'Finished'는 배송완료라는 의미

 

알리의 분쟁 정책은 다소 구매자에게 유리한 면이 있어. 판매자는 알리의 최종 판결을 조건 없이 따라야 하고, 정해진 기간 내에 응답하지 않아도 구매자의 요청대로 종료되기 때문이지. 하지만 구글을 뒤져보니, 알리의 판결이 매우 증거 중심주의여서, 파손이나 손망실처럼 구매자가 적극적으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판매자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더라구. 구조적으로는 구매자에게 유리한 대신, 알리의 의사 개입은 미묘하게 판매자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 (그래서 비싼 물품을 알리에서 살 때는, 개봉할 때부터 제품을 살피는 내내 비디오를 찍어둬야 한대.)

아이큐닉스와 채팅한 내용을 증거로 올리고, "허가된 판매자(Authorised Seller)가 아니기 때문에, 제품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액 환불을 요청했어. Refund Only. 제품은 돌려주지 않는다는 조건도 포함하고. (반품 배송비는 구매자 부담이고, 2kg 넘는 물건이라 2~3만원 정도 비용이 들거든) 이 때가 10월 29일.

문법이 창피하긴 하지만. 증거로 아이큐닉스로부터 받은 이메일 첨부 

 

본사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불법 유통사를 신고한 꼴이 되어서, 셀러의 사이트에서 모든 아이큐닉스 제품이 삭제되었어. 본사가 직접 조치한 모양이야. 내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지. 

 

내가 구매한 링크가 삭제된 화면

 

셀러는 유통 정보가 기재된 서류(?)들을 증거로 제시했는데, 중국어라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문제는 제품 자체의 불법성이 아니라 아이큐닉스로부터의 판매허가 여부인데, 셀러는 초점을 잘못 잡은 것 같아.

심..수.. 증치세보통발..표? 무슨말이야? 세금을 낸 표인가?

 

그다음 날, "맥용 키캡이 400위안 (약 68,000원) 정도 하던데, 필요하니?"라는 제안이 왔어. (처음에 아이큐닉스에 질문한 게, 이 키보드의 맥 키캡을 사려고 한 거라서) 하지만 공식 제안 란에는 Refund $0라고 표기하는 꼼수. 자칫 셀러의 말만 믿고 Accept 버튼을 누르면, 분쟁이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어 한 푼도 못 받는다는 글을 읽은지라 당연히 Reject 버튼을 눌렀지. 

환불없음을 제안하는 동시에, 이 제품에는 맥 키캡이 원래 없었다며 증거 제시. 그게 아니라니까!

 

셀러가 이 내용을 올리기 전까지는, 나는 내 나쁜 습성대로 대응했어 : 웬만하면 걍 정리하자, 내가 손해보고 말지, 싸우는 건 귀찮아 - 뭐 그런 성격. 셀러가 위 내용을 올리기 전까지는 예의 그 습성대로 순진하게 회신했어.

"네가 공식 판매처가 아니라서 A/S가 안되나 봐. 전액 다 환불해 주면 좋겠지만, 너도 억울할 테니 240불 중에서 150불만 환불해 주라. 써보니 이 키보드, 개런티 빼고도 90~100불 가치는 하는 것 같거든."

셀러가 나 같았다면 이 제안 수락했을 거야. ^^ 그럼 나도 만족했을 테고 (싼 키보드 산 셈 치자. 그 값만큼 잘 쓰다가 고장 나면 직접 고치고.) 셀러도 절반만 손해보고, 평점도 안 깎이고 좋았을 텐데. (분쟁에서 지면 타격이 제법 있나 봐. 어떤 셀러들은 자기 해고당한다며 평점이라도 좋게 써달라고 한다더군.)

하지만, 셀러의 대응을 보니, 아아~ 또 나 호구 취급당하는 거야? 조금 화가 나기 시작했어.

만일 그가 정직하게, Refund $0 대신 Refund $60을 적었더라면, 나는 기꺼이 수락했을 거야. 제품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 정품이 의심된다는 것, A/S를 못 받는다는 것 때문이니까. 수리비 미리 받은 셈 치고 말았겠지.

이제 반격! 내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으고, 알리 CS를 통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보내고. 아이큐닉스에게 매일매일 질문을 하고, 회신을 캡쳐하고, 이 모델이 수출용이 아니라 내수용 임도 확인하고, CS에게는 어떻게 속행할 수 있는지도 물어보고. 에이구야. ㅠㅠ

아마도 'Star Wars'라는 이름을 달고 해외에 팔기에는, 저작권료가 만만치 않아서 포기한 게 아닐까.

 

중국의 여러 채널을 접촉하다 보니, 단순히 Authorised Seller가 아니란 이유 때문에 환불한다는 개념을 이해 못하는 것 같더라구. 중국이라는 선입견이 발동하는 순간이지. 셀러만 해도 그래. 얘 딴에는 400위안을 제안한 게 - "왜 클레임을 거는 지 모르겠네, 싸게 샀으면 됐지. (6% 할인가였음) 맥 키캡 없는 거 미리 말하지 않아서 그래? 그것만큼만 보상하면 돼?" - 이 이상으로 생각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구. 

저작권 개념, Authority 개념... 우리나라도 아직 좀 미진하긴 하지만. 

일단, 이 셀러가 못 배워서 그런 거란 생각이 드니까, 내 못난 두 번째 성격이 나오기 시작했어 : 근거 없이 상대를 약자로 상정하고, 한 번 약자로 생각한 대상에게는 막연한 연민을 갖는 것.

이를테면 이런 거지. 

"이미 셀러는 피해를 입었잖아? 내가 셀러 사이트에서 아이큐닉스 제품 다 내리게 했고, 클레임도 먹이고... 내가 당한 만큼 걔네 영업에 지장을 준 거면 된 거 아닐까? 혹은... 애먼 직원이 해고당하는 건 아닐까?"

난 수학도 못하지. 그들의 피해가 액수로는 더 크겠지만, 알리에 100개 이상의 제품을 올려놓고 파는 사람의 주머니와 내 재정상태를 비교하면 내 타격이 더 크다는 걸 - 조금만 생각하면 알 텐데.

협상에 진전이 없어서 11월 3일 알리가 개입을 시작했고, 다음날 판결이 나왔어 : 100% 환불, 제품 반송 불필요. 사유는 위조품 (확률상으로는 내수 제품 빼돌려 파는 거겠지. 말하자면 '보세 키보드'랄까)

 

판결이 나오고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서 셀러가 증거를 추가했는데, 더 많은 서류를 제시하며, "조사가 필요하니 기다려달라"라고 쓰여 있었어. 고의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글자를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작게 캡쳐해서 올렸어. 

블러 안해도 될 만큼 작은 캡쳐

 

알리가 판결을 내린 후에 판매자가 다시 증거를 올리면 자동으로 조사가 홀드 되나 봐. 진행 상태가 'Investigation Pending'으로 변경되었어.

아아아, 이런 게 귀찮았던 건데. 그냥 400위안만 정식으로 offer 했다면 끝났을 텐데. 저급한 술수를...

다시 증거 수집... 뭐 할 게 있겠어. 이게 살인사건도 아닌데, 증거를 짜내야 하는 수준. 아이큐닉스에 연락해서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고 캡쳐. 아이큐닉스는 이런 경우 소비자(=나)에게 어떤 걸 해줄 수 있나요? 미안, 도와줄 방법이 없어, 캡쳐. ^^

그리고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글을 또 올렸지.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네가 정식 판매처가 아니란 이유 때문에 이 제품은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고, 같은 이유로 너를 내가 신뢰하지 못하겠거든? 너 사이트에서 그 키보드 내렸더라? 봐, 너도 아는 거잖아. 문제가 있으니까 내린 거잖아. 내가 채증한 자료와도 일치하잖아. 내가 왜 비싼 돈 내고 불법 유통된 제품을 써야 하고, 왜 네 불법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겪어야 하지? 막말로, 네가 돈 벌자고 부품갈이 했을지 누가 알겠어?"

그리고 다시 알리 CS에게 : 왜 펜딩되었는지 모르겠고, 난 성실히 응하고 있으니 너희도 적극적으로 확인해 달라.

상담원이 알아본다고 하고는 3분 정도 자리를 비우더니, 긴 문장으로 답장을 줬어 : "네가 완벽하게(?) 분쟁을 서술한 것 잘 봤음. 걱정할 거 없어. 다시 판결을 내서 보내줄게. 우리는 우선순위를 재량껏 조정할 수 있으니까 빨리 처리해 줄게. 3~20일 사이에 계좌를 확인해 보렴(?) 빠르면 3일 만에 환불이 될지도 몰라."

그리고 30분 후에 메일이 옴 :

"알리의 판결, 새로운 제안 : 전액 환불, 반송 불필요. 사유는 위조품. 3일 이내에 판매자의 회신이 없으면 이대로 집행됨"

두번째 판결. 최종 판결은 "Final Solution"이라고 쓰여진대.

 

CS에 문제 제기를 하기 전에는 판매자가 증거를 모아 회신할 수 있는 기간이 7일이었어. 그런데 알리 CS가 이 기간을 3일로 줄여 준 거지. 셀러가 가뜩이나 시간을 더 달라고 했는데... 우째.

여기까지가 오늘까지의 진행 상황이야. 아직은 몰라, 3일 사이에 어떻게 바뀔지는. 구글링을 조금만 해 봐도 막판에 역전패했다는 글이 수두룩하니까.

원래 하기 싫었던 싸움이라서, 이겨도 그다지 기쁘진 않을 것 같지만, 내 전형적인 나쁜 습성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나머지 기간을 성실히 대응해 볼 생각이야.

뒷 이야기는 결과가 나온 후에 정리해서 올릴게. 좋은 결과가 있다면 다음 글은 이 키보드의 리뷰가 될 거고, 나쁜 결과로 끝난다면 다음 글의 주제는 현대 자본주의가 개인을 잠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중국의 저작권 감수성에 대한 고찰이 될 거야.

 

ps. 아이큐닉스 제품 괜찮은 것 같아. 리뷰들도 칭찬일색이고. 값이 좀 많이 쎄지만, 유무선 겸용(블루투스)/맥 겸용/알루미늄 바디/체리 스위치 정도면 다 이정도 가격 하는 거 같더라구. 일반 기계식 키보드보다 디자인도 좋고 말이지. 무엇보다 친절히 도와 준 아이큐닉스 직원들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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