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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과 영화의 관계 - 영화와 소설을 모두 보는 게 좋은 걸까?

Curious ARTBRAIN 2021. 6. 22. 02:01

어쩌다 영화는 소설로부터 시나리오를 추출하게 되었을까. 최근에는 원작 없는 영화를 본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아. 픽사 영화정도? 1917도 원작이 없던가?

시나리오 자체가 원작인 영화도 많겠지만, 이제껏 본 영화를 복기해 보면 소설이 원작인 영화가 두 배는 더 많은 것 같아. 제작자 입장에서는 소설을 통해 검증된 시나리오를 받는 게 유리하겠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뭔가 찜찜한 느낌이야. 영화와 소설을 모두 감상한다고 하더라도 즐거움이 두 배 될리는 만무하거니와, 자연스레 둘을 비교하게 되니까 어느 한쪽에는 아쉬움이 생기게 되는 거지. 그래서인지 영화 사이트에 올라오는 관객 리뷰를 보면 한결같아. 

"원작 소설을 반도 살리지 못했다."
"원작을 훼손했다."

사실, 영화 입장에서는 억울할 거야. 장편 소설을 읽는 시간만큼 러닝타임을 쓸 수만 있다면 훨씬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을텐데, 영화는 2~3시간 안에 스토리를 끝내야 하니까. 아무리 시각 정보(+청각 정보)가 텍스트 정보보다 직관적이기는 해도, 사람의 뇌가 시간당 처리할 수 있는 절대값이 있기 때문에 소설보다는 아무래도 표현의 한계가 있을 거야. 소설은 몇 문장 만으로 많은 내용을 독자의 상상력에 떠넘길 수 있지만, 시각 매체는 직접 지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한계도 있고. 

857시간(37일)짜리 영화도 있긴 하지만. - © Logistics


간단히 몇 개의 영화를 추려봤어.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영화/소설을 둘 다 읽은 책은 많지 않지만, 나름의 지표가 되리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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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 영화 승

© 20th Century Fox

상업영화 및 소설이 퀄리티를 스스로 망가뜨리는 원인 중에 하나는, 인기를 연장하기 위해서 속편을 내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3권으로 늘어나면서 이야기가 지루해진 면이 있어. 소설이 얼개의 세밀함 면에서는 압도적이지만, 초반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확장할 만큼의 즐거움을 만들지는 못한 것 같아. 첫 한 권은 신선했지만 마무리가 아쉬웠어. 반면 영화는 초반 설계를 잘 짠 덕분에 영화 내내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었어. 또한, 불을 다루는 여주인공의 초능력을 공기보다 가벼운 캐릭터의 초능력과 바꾼 것이 팀 버튼의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덕분에 시각적인 성취는 물론 영화 전반의 메타포와 맞물려 잘 정렬된 것 같아.

2. 컨택트 / Arrival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소설 승

© Universal Pictures

한국 제목은 '컨택트', 영어 제목은 'Arrival', 책 제목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소설책으로는 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짧은 단편인데 영화는 2시간에 가까워. 이 정도면 영화로서도 책 만큼의 풍부한 스토리를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밋밋한 느낌이었어. 영화와 소설 모두 시간과 인과에 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통찰이 주제인데, 그 주제를 설명하는 중요한 플롯을 영화에서는 단순히 반전 요소로만 활용한 것 같아. 외계인의 형상과 그들의 언어를 시각화한 것은 신기했지만 선뜻 동의할 수준은 아니었고, 오직 주인공들의 호연만 빛났던 것 같아. (게다가 헐리우드 요즘 영화가 다 그렇지만, 맥락과 관계없는 중국인 끼얹기는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이었어.)

3.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 영화 승

© Warner Bros.Paramount, PicturesThe Kennedy, Marshall Company

원작 소설은 위의 '컨택트'보다 더 짧아. 서너 페이지 정도였을 거야.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 살을 잘 붙여서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어. 각색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데 아이디어만 빌려 온 정도지. 개인적으로는 이런 작업방식 찬성이야. 이야기의 전체 흐름을 굳이 다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봐. 아무리 감독이 소설가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해도 완전히 시선이 일치할 순 없는 거잖아. 그 지점에서 원작 소설은 감독에게 걸림돌이 되게 마련이니까. 영화도 소설도 모두 훌륭했지만, 소설-영화의 관계로만 보면 영화의 성취가 조금 더 높은 것 같아.

4. 헝거게임 - 무승부

© Lionsgate

혹자는 소설이 하이틴용(?)이라는 이유로 폄하하던데, 그렇게까지 전형적인 책은 아니라고 봐. 영화도 소설의 주제의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져왔고, 또 멋지게 시각화했어. 걸출한 배우들의 호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 하지만 소설과 영화 모두 각각의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소설은 소설답지 않게 너무 시각적 상상력만을 자극한 느낌이라서 소설만의 매력을 느끼기엔 아쉬움이 있었고, 영화는 4부작으로 충분한 시간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관점을 확보하지 못한 게 아쉬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소설 모두 훌륭한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둘 다 수준 이상의 작품성을 가지는 건 흔한 일이 아닌 것 같아. 영화 감독은 소설을 잘 따라가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소설 자체를 훼손(?) 하지도 않았고, 소설 입장에서도 영화에 대해서 아쉬운 부분은 없었으리라 생각해. (원작자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번외로, 이 영화는 디지털 마케팅을 정말 훌륭하게 해냈다고 생각해. 영화 바깥의 세부사항을 설명하기 위해서 대여섯개의 사이트를 만들고,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소셜 마케팅은 물론, 별도의 비디오 클립까지 만들면서 영화의 세계관을 꽉꽉 채웠더랬지.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잘 정리하면 영화 제작 및 홍보, 운영에 관한 훌륭한 지침서, 교과서가 될 것 같은데, 왜 메이킹 필름 같은 후반 정리 작업물이 안 나오나 몰라.

5. 반지의 제왕 - 소설 승

© New Line Cinema

피터 잭슨의 진심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거야. 팬심과 야심으로 똘똘 뭉친 감독이 영화에 조금의 생채기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해서 영화를 만든 게 영화 내내 보여. 하지만 원작 소설이 워낙 미친 설정이라서, 9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도 소설을 담기엔 무리가 있지. 시간날 때마다 틈틈이 소설책을 읽는데, 아직도 다 못 읽었어. ^^

20부작 영화 정도 되면 소설을 담는 게 가능할까? ㅎㅎ 그럼 제작자는 20년 정도 아무것도 못하겠지? 배우들이 늙는 건 요즘 기술로 커버 가능하니까... 노력하면 가능할지도? ^^

6. 올드보이 - 만화 승

© ShowEast

내가 영화 스탭으로 일할 때 소문이 있었어. 박찬욱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데, 만화가 원작이라더라. 그래서 영화 개봉 전에 만화를 먼저 볼 수 있었지. 만화와의 연결고리는 아주 약한 것 같아. 결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데, 결말 부분만 보면 - 그냥 다른 두 작품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아. 위의 '벤자민 버튼'이 주제를 유지한 채 다른 이야기를 했다면, 올드보이는 같은 이야기인 듯 다른 이야기라는 게 좀 찜찜해. 

이게 좀 미묘하면서 재밌는 것이 — 각색하는 게 옳은가 그른가의 경계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아.

어떤 이야기든 이야기 전반을 아우르는 '정신' 같은 게 있잖아. 여기저기를 다 솎아내고도 남아있는 마지막 핵심 내용. 그걸 건드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안될 건 뭐람"이라는 생각과, "그럼 다른 이야기를 가져왔었어야지"라는 생각이 양립하거든.

영화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올드보이는 그런 관점에서 내게 비릿한 뒷맛을 남기는 영화야. 만화는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즐거움과 생각할 거리를 모두 제공하는 반면, 영화는 스토리든 볼거리든 너무 자극적이거든.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영화의 주제 자체를 바꾸는 거라서 투머치라 생각해. 자극을 위한 자극.

올드보이 만큼은 나도 "원작을 훼손했다"라고 리뷰를 달 것 같아.

7. 아가씨 / 핑거스미스 - 소설 압승

© 모호필름

박찬욱을 싫어하는 건가. 그의 작법이 마뜩잖은 건가.

핑거스미스는 부드럽고 섬세한 이야기야. 섹스가 과할 필요도 없고, 육체보다 시선을 강조해야 하는 종류의 소설이지. 섹스신을 보여줄 시간에 더 디테일한 동작에 포커스를 맞췄어야 했어. 그런데 소설과는 다르게 자극적으로 영화를 만든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래서 얻은 게 뭐지? 선정성? 원작은 심지어 남성성을 배제하려는 톤을 유지하는데, 영화는 노골적으로 마초적인 시선훑기를 남발하는 게 말이 되나 싶고.

말했듯이, 영화가 소설을 이어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 아이디어만 가져올 수도 있지. 똑같은 걸 만들 거면 굳이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영화와 소설이 다른 창작물이 되어도 좋다는 입장이야. 하지만, 영화를 이렇게 만들 거면, 굳이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삼아야 했을까? 감독의 주제와 보다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다른 소설은 없었을까? (소설의 아우라를 빌려오고 싶었던 걸까?) 박찬욱 감독이 다독가라던데, 그가 소설을 다독한다고 생각지는 않아. 철학책을 읽고 그걸 응용하려는 노력이 너무 잘 보이는데, 그런 식으로 자신의 그레이드를 올리려는 게 안타까워. 원작자가 영화를 좋게 봤다고 하지만 (링크) ... 난 원작자의 이해심이 넓은 것뿐이라 생각해.

8.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소설 승

영화가 소설을 잘 이어받았어. 영화 기법은 모르겠지만, 스토리 전개는 오히려 소설보다 나은 부분이 있었고, 마치 소설가와 공동작업을 했나 싶게 결이 맞았다고 봐. 소설이 소설로서의 풍부함을 성취했다면, 영화는 영화로 가능한 부분을 충실하게 보충한 것 같아. 

하지만 문제는 결말에 있어. (그리고 퀄리티에 치명적인 결함이 되지.)

소설에서는 엄석대가 커서 초라한 잡범(소매치기?)이 되는데, 영화에서는 어두운 세계의 거물이 된 것처럼 묘사해. 아마도 감독이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 학교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나 보지. 당시 사회와 체제에 대한 고발을 하고 싶었던 거 같은데... 영화로서는 그게 더 어울리긴 하지만 그 맺음 때문에 영화가 뻔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야. 그냥... 잡범으로서도 충분히 사회악인데 말이지. 사소한 범죄자와의 인연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불편을 사회 문제로 승화시키려 하는 게 꼭 필요한 전개였을까 싶어. 전형적인 독후감을 양산하는 영화가 되어버렸지. 마지막 3분 때문에.

9. 라이프 오브 파이 - 영화 승

© Dune Entertainment

영화는 영화적이 되기 위해 반드시 원작을 각색해야만 할까 — 라는 질문에 보기좋게 'no'를 외치게 해주는 영화라고 생각해.

원작을 해치지 않고서도 시각적인 성취는 물론, 감독의 목소리도 담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잔잔한 바닷물과 플랑크톤의 화려함 같은 걸로도 감독의 해석을 보여줄 수 있는 거거든. 훌륭한 지휘자 같은 거지. 똑같은 클래식 넘버를 연주하더라도 더욱더 풍부하고 시대정신에 맞게 해석하는 것.

 


 

결론

쓰면서 정리하는 생각. (사실 블로그라는 게, 생각 정리하려고 쓰는 거지) 

소설가와 영화 감독 모두 창작자고, 소설과 영화는 별개의 창작물이야. 오마주든 패러디든 리메이크든, 소설가를 '원작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영화감독은 최대한 원작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원작에 얽매일 필요도 없어. 어쨌든 영화는 영화니까.

그래서 여러 경우가 생기는 것 같아.

1. 영화를 계승하고 시각화하는 작업에 충실한 경우
2. 소설에서 아이디어만 가져오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
3. 원작의 대부분을 가져오지만 결론만 비트는 경우
4. 원작에 적대적인 경우

다 가능하다고 보는데, 그래도 3번은 약간 좀 그래. 차라리 4번은 권장할만하지.

사람이 세상의 모든 소설을 뒤져볼 순 없겠지만, 더 정확하게 같은 곳을 바라보는 소설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은 거지. 작가의 자의식이 강한 건 이해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꼬리만 살짝 매만지는 건 작가로서 불성실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의식만 크고 성실하진 않은 유형. 사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퀄리티와 관계없이 저급한 패러디일 뿐이라 생각해.

게다가, 무엇보다도...
소설을 원작 삼아서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맘에 안 들어. 영화감독이 언제부터 남의 이야기에 기대야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