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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용 만년필의 최강자는? - 라미 사파리 vs. 트위스비 에코

ARTBRAIN 2021. 9. 5. 23:27

최근에 산 페리스휠 노란색 잉크(link)와 궁합이 좋은 만년필이 있을까 해서 갖고 있는 것 중에 색깔이 어울릴만한 두 자루를 골라 봤는데, 공교롭게도 입문용 만년필의 대명사인 라미 알스타와 트위스비 에코였어. 

꺼내고 찬찬히 살펴보니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만년필이라서, 만년필 입문자들이 고민할 사항을 기준으로 글을 써보려 해. 모쪼록 도움이 되길 바라.

노란색 잉크와 어울릴 것 같은 두 만년필 (좌) 트위스비 에코 (우) 라미 알스타

제목에는 라미 '사파리'라고 썼는데, 오른쪽 만년필은 사파리보다 한 등급 높은 알스타(al-star)라는 모델이야. 하지만 사파리와 알스타는 배럴의 소재만 다르고 완전히 같은 모델이거든. 사파리는 배럴이 ABS 플라스틱이고 알스타는 알루미늄이라는 차이밖에 없어. 그래서 이미지는 알스타지만 내용은 사파리를 기준으로 쓸게. (노란색 잉크에 어울리는 사파리 모델이 없어서^^)

두 개의 크기는 거의 같아. 약 14cm. 평균적인 만년필에 비해 큰 편이지. 무게는 에코가 21그램이고, 사파리는 17그램. 이건 에코가 무겁다기 보단 사파리가 가벼운 편이야. (알루미늄인 알스타는 에코와 무게가 거의 같아.) 완전히 원통형 배럴인 에코와 달리, 원통 양쪽을 잘라낸 형태인 사파리가 입문자들에게는 더 쥐기 편할 거야.

둘 다 뒤에 캡을 꽂아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캡을 뒤에 꽂으면 뒤쪽이 너무 쳐져. 캡꽂하지 않고 쓰는 걸 권장해. (사파리는 캡꽂 하더라도 그럭저럭 쓸 수는 있는데, 에코는 상당히 부담스러워. 에코의 캡이 훨씬 더 무겁거든.) 

이 두 만년필이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옆면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사파리는 그립 부분이 길고 단면이 세모꼴인 반면, 에코는 그립부가 짧고 원통형이야. 에코는 돌려 여는 방식이라서 그립부 끝에 나사산이 있는데, 사파리는 뽁따 방식이라 나사산이 없어. 펜촉 방향에도 차이가 있는데, 사파리는 펜촉이 약간 아래쪽을 보고 있는데, 에코는 몸통과 나란히 뻗어 있어. 

사파리의 이런 특징은 모든 사용자들이 불편하지 않게 만년필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어. 엄청난 자율성. 캡을 빼고 쓰면 일반 만년필처럼 짧게 잡고 쓸 수 있고, 캡을 끼워 쓰면 길게 잡고 쓸 수 있어. 나사산이 없으니까 검은색 부분의 맨 끝을 쥐어도 좋고, 심지어 배럴 부분을 잡고 써도 어색하지 않아. 펜촉이 약간 아래로 향해 있는 것도 눕혀 쓰는 사용자를 배려한 거지.

그에 비해서 에코는 '좋은 만년필'의 전통을 저렴한 가격에 느낄 수 있게 의도한 것 같아. 적당히 묵직하고 통통한 배럴, 엄청나게 많은 잉크를 담을 수 있는 피스톤 필러 방식,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쉽게 '완전 분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조 등 - 에코는 입문자용이기도 하지만, 만년필을 잘 아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려 한 것 같아. 대신 정해진 방식으로 그립을 잡아야 하고, 길게 잡으면 나사산이 거슬리기도 하고… 만년필이 "이런 규칙 정돈 알고 있지?"라고 말하는 느낌이야.

똑같은 잉크인데, 라미는 컨버터에 남아있던 잉크와 섞여서 색이 탁해졌어.

둘 다 EF(가장 가는) 촉인데 사파리가 약간 더 두껍게 써져. 모두 사각거리는 필감을 기본으로 하지만, 에코가 미묘하게 더 매끈한 느낌이야. 잉크 흐름은 둘 다 좋은데, 사파리 쪽이 약간 더 풍부하게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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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만년필을 처음 사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라미 사파리가 원톱이라고 봐. 가격도 싸고. (사파리는 싸게 사면 만 원 초반, 에코와 알스타는 4만 원 정도.) 그런데 사파리는 '만년필'이라기보다는 '필기구'라는 느낌이 강해. 말장난 같지만^^ 지나치게 범용성을 강조한 느낌이랄까. 어떻게 써도 문제 될 게 없고, 잉크를 채우는 방식만 아니라면 '만년필'임을 의식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어. 재미가 덜하달까.

하지만 뽑기 운이 필요없을 정도로 균일한 품질이라서 속 썩을 일도 없고, 특별하게 관리하지 않고서도 오랫동안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독보적인 장점이지. 쓰다가 업그레이드 하고 싶거나 글씨 두께를 조정하고 싶으면, 닙(Nib, 촉)만 사서 교체할 수 있으니까 실용적이기도 하고. * 혹자는 라미 제품이 불량율이 높다고 하던데, 사파리부터 다이얼로그까지 - 라미 것만 15개 이상 써 본 입장에서는 별로 믿기지 않는 말이야. 한 번도 에러가 없었거든. 하지만, 그냥 내가 운이 좋았었는지도 모르지. 

그에 비해서 만년필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트위스비 에코를 추천해. 사자마자 분해해서 직접 피스톤을 윤활해야 하고, 권장하는 방법으로 잡아야 최고의 성능을 보여주는 등 - 초보자 기준으로는 까다로울 수 있어. 하지만 막상 써 보면, 별 거 아니야. 오히려 재밌는 수준일 걸? 

베스트는 - 당연히 둘 다 사보는 거야. ^^ 그래 봐야 5만 원이면 되니까. (통상 "괜찮은" 만년필이면 적어도 10만 원은 넘거든. 이 두 개는, 품질에 비해서 정말 놀랍도록 싼 거야.) 라미 사파리가 '만년필의 기본기'를 가르쳐 준다면, 트위스비 에코는 '만년필을 쓰는 기본기'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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