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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 영화와 소설 모두 아쉬운.

ARTBRAIN 2021. 8. 8. 02:53

언제부턴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게 루틴이 되었어. 

소설 '걸 온 더 트레인'을 우연히 읽게 되었고, 엄청나게 흥행했다길래 영화화되었을까 찾아보니, 왓챠에 있더라고. 2016년 작. 넷플릭스에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인도 영화가 있는데, 그건 뭐... 시작하자마자 춤추고 난리도 아니어서 패스. ^^


소설을 기준으로 먼저 얘기하자면 —

세 남자와 세 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종(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인데, 추리를 이끌어야 하는 주인공 레이첼(에밀리 블런트)이 알코올 중독자라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대책없는 거짓말도 해대는 캐릭터야. 추리물의 주인공은 다들 흠결이 하나씩은 있다지만, 이 정도로 엉망인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세운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요 네스뵈 소설의 주인공 해리 홀레 형사, 하이펑셔닝 소시오패스 셜록 홈즈도 문제 많은 캐릭터지만, 걔들은 능력이라도 좋았지.) 또한, 실종 전의 시간과 실종 후의 시간이 병렬로 전개되는데, 처음엔 어색하지만 뒤로 갈수록 서로 두 시간축이 서로 끼워 맞춰지는 게 나름 매력적이야.

이 이상의 줄거리 설명을 하기엔 내 묘사 능력이 떨어지니까 생략.
(접속 무비월드로 대체 - 정리를 잘했더군. 심지어 결론까지 다 나옴)

소설의 주제라면 — 남자의 가스라이팅, 세 여자로 묘사되는 여성의 한계 상황과 극복 의지(?) 정도일 거야. 통속소설 치고는 주제의식이 뚜렷해. 내용과 관계없이 위트를 부리는 문장이라던가 스릴러 치고는 좀 엉성한 구성 때문에 좋은 소설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왜 흥행했는지는 알 것 같아. 

소설을 다 읽고, 바로 영화를 봤어.
오, 이게 뭐야. 배우진이 이렇게나 화려할 일이야? 

월드 오브 투모로우로 여전사 배우 1순위가 된 에밀리 블런트(레이첼), 호빗이나 드라큘라 등 중세 액션 영화에서 호연하는 루크 에반스(스콧), 미션 임파서블과 위대한 쇼맨에서 시작해서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레베카 퍼거슨(애나), 이번에 처음 본 놀라운 신인 헤일리 베넷(매건)... 게다가, 조연들도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엄청난 배우들만 모아놨더라구. 무조건 재밌겠다 싶었지. 만. ^^

개인적으론 재밌게 봤어. 별점 셋. 하지만,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재밌게 볼 것 같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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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감독에게 존경을.

적지 않은 분량의 소설을 훌륭하게 정리해 냈어. 플롯을 단순하게 하면서도 원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발전시킨 것 같아. 여성 이야기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형사 역을 여자로 바꾼 것이라던가, 원래 레이첼, 매건, 애나의 세 이야기로 진행되는 소설의 구조 중에서 상대적으로 포인트가 적은 애나의 역할을 줄이고 캐릭터를 평면화한 것도 잘한 일이라 생각해. 레이첼이 카말에게 심리 상담을 받은 이유도 냉장고에 붙어 있는 명함 한장으로 처리해 버리는 감각도 감탄스러웠어. (압축의 백미는 화장실에서 형사와 레이첼이 대화하는 씬. 정말 훌륭함.)

하지만, 본질적인 이야기만 하다 보니 극이 좀 무겁고 어두워졌어. 게다가 소설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시간축 전개를 따라가려 하다 보니, 영화에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혼동스러운 부분도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의 약한 부분까지 그대로 가져오면서 완성도도 소설의 수준을 넘지 못한 것 같아. 

이전 포스팅(링크)에서 나는 소설을 영화화하는 바른 방법은 무엇일까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땐 '소설의 완성도가 훌륭할 때'를 전제한 것 같아. 하지만 이 원작 소설은 그 때 언급했던 원작들보단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 때의 결론이 이 영화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조금은 적극적인 해석으로 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여전히 고민스러운 것은 — 원작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면, 감독이 그걸 보강해야 하는가. 그 과정에서 얘기를 바꾸어야 한다면, 극의 완성도를 위해서 용인해야 하는가.

이전까지는, 소설을 정밀하게 이해하면서 존중하는 것이 '소설을 번안하는 영화감독'의 의무라고 말한 것 같은데, 이 경우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아. 흥행한 소설이라고 좋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닐진대... 좀 더 '개선'해도 좋지 않았을까 싶어. 저 좋은 배우들로 이정도 성취의 영화를 만들다니 — 배우들이 아깝잖아. ^^

다시 말하지만, 정밀하게 주제를 분리해낸 것은 정말 훌륭한 솜씨라고 생각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다시 책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로 훌륭하게 핵심을 꺼내 온 것 같아. 하지만, 영화만을 본 사람들에게는 —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은 영화일 거야. 

연출도 준수하고 촬영도 괜찮고, 배우도 좋고, 음향까지 좋은데 다 합쳐놓으니 별로야. 신기하지? 
오직 감독이 설정한 '방향'만이 잘못되었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좋아하는 배우들의 호연은 여전히 빛나는데, 그들이 모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서 아쉬움이 커.

에밀리 블런트는 알콜 중독자 역할을 맡기엔 너무 차분해서 망가진 느낌이 들지 않았고, 너무 극을 어둡게 만들었어. 레베카 퍼거슨은 유부남을 빼앗은 요부의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우아한 외모 덕에 딱 현모양처. 루크 에반스는 (역할이 축소되기도 했지만) 극의 중반까지 용의자로 의심을 받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정의로운 생김새라서. ^^ 전형적인 백인 떡대 마초를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

그리고 헤일리 베넷.

처음보는 배우인데, 영화 전체를 이끌 정도로 연기를 잘했어. 뭔가 제니퍼 로렌스를 닮았는데 훨씬 섹시하고 위험하고 신비롭고. 여러모로 주목할만한 배우같아. 앞으로 자주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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