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엔 두근거렸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방송사의 디지털 언어를 내 손으로 개편한다는 건 참 엄청난 일이잖아.
동시에 겁나기도 했었어. 그 당시 가용할 수 있는 디자이너도 마땅치 않았던 데다, 기간도 썩 길지 않았거든. 최소 20명에 1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그토록 어필했지만, 실제 초도 투입 디자이너는 예닐곱명? 물론 조금 지난 후에는 우리 팀 다 붙고, 타 팀장 둘 빌리고, 그 팀원들 두어명씩 더 붙었으니, 중후반에는 한 열 대여섯명 되었겠네.
그래도, 자신은 있었어. 마침 그 때는 전에 했던 중앙일보 디지털 개편이 언론사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던 때였고, 후발주자들의 스탠다드로 참고되는 시기였거든. 회사의 업력도 작용했겠지만, 어쨌든 KBS에서 애써 우리와 일을 하려 한 것은 중앙일보의 성과 때문이었기에 이들이 어떤 걸 원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힌트가 충분했지.
조금 자뻑도 있었어. 중앙일보 프로젝트를 통해 텍스트 기반의 플랫폼 사업에 이미 자신이 있었던 데다, 이전 티빙 프로젝트를 통해 미디어 플랫폼의 속성이나 운용에도 나름 노하우가 있었으니까. 뭐 딱 내 꺼다 싶었지. ^^
2016년 1월에 킥오프를 진행했지만, 실제로 업무는 한달 정도 전부터 시작했어.
일단, 이 프로젝트가 다른 프로젝트와 다른 점은 바로 이 - 엄청난 이해관계자의 수였어. 각 지역국의 자치도가 높기도 하고, 역사가 길기도 하니 어쩌면 당연한 거지. 말이 정규직 4500명이지, 전국적으로 퍼진 규모와 계열사들 규모까지 따지면 어마어마 하잖아. 저 회의에 참여한 관계자만 해도 100여명 정도였으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건 오히려 KBS에 대한 내 선입견이었지. 예전엔 국영기업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시청료를 받는 회사이기 때문에 - 뭔가 중앙집권적이고, 비영리적이며, 이해 회피적인 조직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아. 이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얘기였는데, 공무원적인 사고는 맞지만, 권력은 그렇지 않더라구. 중앙통제라기보다는 각각의 지역국들과 프로그램들이 각자도생하는, 나름 그들만의 열정, 자존심 같은 게 있더라구.
돌이켜 보면, 내가 순진했지. 밖에서 보는 KBS는 참 전형적인 조직이잖아. 충분히 자기 분야를 선점한 거대 기업이고, 국가적인 책임이 있는 동시에 안정적인 환경이 조성된 - 전형적인 공무원 기업이지, 보수적인 따분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돌이켜 보면, 어떤 조직이든 그들만의 동인이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싶어.
이해관계자를 쪼개보면 다음과 같아.
- 컨텐츠 제작자 그룹 : 빠른 호흡과 성과주의가 강하지, 아무래도 시청률이라는 지표가 분명하고, 그 결과값이 개인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 극명하게 나뉘니까, 자신의 컨텐츠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
- 지역국 그룹 : 각각의 지역국 성격이 워낙 달라서, 한 형태로 묶는 게 의미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봐.
- 전략/편성/기술 : 각 컨텐츠들의 관리/조율 및 공공사업분야 (ex. 재난서비스) 서비스 개발. 특히 각 요소들의 협업을 잘 만들어야 하는 이슈가 있지.
- 뉴스 : 특수한 상황이야. 이들은 나름의 독자적인 생태계가 있고, 독립성이 보장되는 그룹이어야 하지.
- 미디어 그룹 : 사실은 본사 바깥에 있어. 뉴스를 제외한 모든 컨텐츠의 디지털 화면을 제작하는 부서... 라기보다는 회사지. 항상 업무가 많고, 각각의 힘에 밀려서 디지털 화면조차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
물론, 이 분석은 개인적인 감상에 가까워. 아무리 디자인 총괄이래도 기획 파트보다야 구조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초반에 분석한 KBS의 모습은 좀 암담했어. 어떤 걸 하더라도 이것보단 낫겠구나 싶어서 내심 안도는 했지만, 이런 산만한 형태가 된 데에는 이 조직의 한계도 있다는 얘기잖아. 남들이 못한 곳에서 내가 잘하기는 힘든 법이니까 불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일단은, 두 개의 채널로 시작했어.
- 모을 수 있는 데까지 KBS의 자료를 수집하기. 워낙 다양한 형태가 있다보니 유형을 파악하기 어려웠어. 분류가 불가능할 지경이었으니까.
- 1번의 결과로 호기심이 동했던 부분인데, 누가 어떻게 디자인+UI를 결정하는 지 알아보기. 국장님의 전폭적으로 권한을 준 탓에 두루두루 쑤셔(?)볼 수 있었지.
기획이 달리는 동안, 나는 “누가” 디자인하는지가 궁금했어.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UI도 그때그때 달랐으니까.
통제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없는 걸까?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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