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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래를 그리는 아이 : 은유로서의 디자인 업무

ARTBRAIN 2022. 12. 16. 10:05

디자이너의 성장에 대해서 고민할 때마다 이 영상이 항상 머릿속에 떠올라.
내 성장이든, 내 팀원의 성장이든, 항상 염두에 두고 경계하는 내용이야.

어느 날 미술시간, 선생님은 자유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지.

다른 아이들은 각자 귀여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토시오는,

종이를 시커멓게 가득 칠하고만 있어.

선생님은 이걸 보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교무실에 가져가 선생님들과 상의하고,

부모님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우리의 토시오는 밤낮없이 종이들을 까맣게 채워 나가고.

급기야 선생님은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는데,

토시오는 대답하지도 않고, 계속 까만 칠만 계속해.

일이 커져서 병원에까지 가게 되고, 한 아이에겐 오버스러울 만큼 많은 의사가 동원되지만,

토시오는 계속 묵묵히 까만 칠만 계속해.

토시오는 더 이상 등교하지 못하고,

병원에 갇혀서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그러던 중, 선생님이 아이의 책상에서 퍼즐 조각을 발견하게 되고,

마침, 간호사도 뭔가를 깨닫고 그림들을 맞춰보기 시작해.

갑자기 분주해지는 의사와 간호사

토시오가 칠한 종이를 체육관에 깔아보는 의사들.

놓인 결과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

500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종이로 만들어진 검은 고래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


아이들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으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건데,
나는 여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보곤 해.

1. 먼저 선생님의 입장 (디렉터)

어른 기준으로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할 거야.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아서 여러 명이 걱정하고 고생하고... ^^

그런데,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그걸 말하는 게 쉽지는 않아. 말을 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비-디자이너를 이해시키는 건 또 다른 얘기거든. 얼핏 '고래 그려요'라고 말하면 모두가 이해해줄 것 같지만, 그걸 다른 이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만일 그걸 충분히 이해시켰다 하더라도, 다른 간섭이 들어오게 마련이지. "꼭 그렇게 크게 그려야 하겠냐, 작은 종이에 그리면 안되냐", "어디에 전시할 건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등등.

아무리 요즈음의 디자인 정서가 데이터 드리븐, 객관성 확보라고 하더라도, 처음 아이디어를 낼 때는 직관에 의존하는 게 흔한 일이잖아. 또한 나는 - 직관이란 오랜 경험과 지식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야.^^

실제로 나는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하는 디자이너들을 많이 만나고, 나 스스로도 내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대해 항상 아쉬움을 느껴. 디자인을 잘하는 것과 자기 디자인을 잘 설명하는 건 완전히 다른 거라서 - 디렉터로서 디자이너들의 의도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얼마나 기다려 줘야 디자이너가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까 - 를 항상 고민해.

최대한 마지막까지 개입하지 않는 게 최선일 수 있지만, 얘가 스스로 머릿 속에 고래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는 거잖아. 공연히 시행착오의 규모만 커질 수 있거든.

계륵이야,

그들의 큰 그릇을 (작은 그릇인) 내가 못알아 보는 건지, 그들이 큰 그릇이라고 판단하는 게 내 실수인 건지 파악하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아. 개개인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그 앞길을 막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성장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2. 아이의 입장 (디자이너)

당연히,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면 여러 사람의 고생을 줄일 수 있을 거야. 많은 디자이너들이 작가적인 마인드로 일하곤 하는데, 디자이너는 협업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작가와 구별되는 것 같아.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디자이너의 역량 중 최소 40%는 차지한다고 봐.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말로, 또는 ppt, 키노트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그림을 실현해낼 확률은 점점 더 작아질 거야.

또한, 디렉터가 보기에 이 그림은 효율이 너무 나빠. 아이가 자신의 의도를 선생님에게 잘 설명했다면, 크레용 대신 물감이나 검은 종이 오리기 등으로 - 보다 쉽고 빠르게 결과를 냈을지도 모르잖아. 꼭 "크레용으로 그려야만 해!"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쉽고 빠른) 방법을 알았다면 다시 고민할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디자이너의 똥고집은 다른 부서 사람들에게는 정말 짜증나는 일이거든. ^^

3. 부모님의 입장 (PM, 관리자)

엄청나게 많은 종이를 사용했잖아. 학교 종이와 검은 크레용은 쟤가 다 썼을 거야. 병원에서 쓴 것도 다 청구되었을 거 같아. ^^
아마도... 아이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설명했더라도 부모님은 '다른 방식으로' 그리길 원했을 거야. 그 그림에 아이가 부여하는 가치를 알지 못하면, 아이의 돈낭비를 막고자 하는 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잖아.

PM 혹은 관리자/기획자의 입장에서, 디자인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디자인이라는 업무가 정량적으로 계측 가능한 가치를 만든다면 좋겠지만, 대개의 디자인이란 약간의 확률(가능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거든. 오히려 디렉터의 고민보다 이 직군의 사람들이 하는 고민의 난이도가 훨씬 더 클 거야. 디렉터는 디자이너의 잠재력을 어느 정도 파악하면 기다릴지 디렉션을 줄지 선택할 수 있지만, (비-디자인) 관리자는 쟤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괜히 허튼짓하는 건 아닌지 알 방법이 전혀 없거든. 그러다 보니 "잘은 모르겠지만, 저건 아닌 것 같아요"라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표현만 하게 되지. ^^

4. 의사들의 입장 (CEO?)

이 영상에서 가장 바보같은 건 병원 사람들이야. 아이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자신들의 전문성으로 분석하지도 못했고, 고작 관찰만 했을 뿐이지. 아이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분석했겠지만... 과연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 작업을 했을까?

결과를 토대로 아이를 판단하는 건 디자이너들이 자주 겪는 스트레스와 비슷한 것 같아. 결과는 아이로부터 왔지만,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부모님, 친구들, 선생님들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을 텐데. 오직 아이만을 관찰하는 건 최악의 접근방식이지.

5. 그나저나, 저게 고래 맞아? (??)

영상에서 아이가 그린 그림이 '고래'라고 말한 건 의사였어. 그런데 아이가 그린 게 고래는 맞는 걸까?
한 번 의심을 하고 보니 도저히 고래처럼 보이지 않더라구.

디자이너의 작업물이 주변의 동의를 받지 못하거나, 오해를 사는 경우도 흔한 일이야.
즉, 이 영상은 두 가지 상황을 보여주는데 - 첫번째는 작업 과정과 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두번째는 작업 결과가 소비되는 과정이지.

아이는 정말 저걸 고래라고 그렸을 수도 있고, 단지 추상적인 무엇을 그린 것일 수도 있지. (내가 보기엔 옆으로 누운 심장 같이 보이는데...) 혹은 그림을 그리다 보니 우연히 형태가 만들어진 걸 수도 있지. 일단 '고래'라고 정의되는 것에 대해서 디자이너는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개진해야 하겠지만, 이해관계자들이 디자인 작업물을 제멋대로 정의하는 것을 막기는 꽤 어려운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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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없어. 그냥. 일할 때 이 영상을 자주 떠올린다는 거.
이 영상은 - 디자이너로서, 디렉터로서, 관리자로서, PM으로서 - 내가 가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때,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좋은 도구라는 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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