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사게 되는 몇 개의 만년필이 있어.
라미 사파리, 파이롯트의 카쿠노나 캡리스, 트위스비 에코 등등이 그런 대표적인 '입문기'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약간 더 만년필에 빠지게 되는 모델 중에 대표적인 게 라미2000 (이쪽 바닥에선 라미케라고 부름. 라미2K라는 뜻) 이야. 개인적으로는 이런 형식의 디자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사지 않고 있었는데, 재작년 말에 일마존 블프에서 10만 원 중반대에 나와서 걍 질렀어.
라미케의 외형은 전형적인 바우하우스적 디자인이라서, 전통적인 디자인을 선호하는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거든. 아무리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탔다지만, 여전히 '예쁘다'고 생각되진 않아.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1년 동안 사용해 본 감상을 간단히 옮겨볼까 해.
백이면 백 — 이 만년필을 좋아하는 사람은 라미케만의 부드러운 필감을 애정하는 거라고 생각해. 14K 금촉이면서도 후디드 닙이라서, 부드럽지만 낭창거리지 않고 안정감이 있어. 일반적인 형태의 (부드러운) 만년필 닙은 부드러운 만큼 탄성의 영향을 받는 데, 라미케는 필압에 영향을 덜 받아서 항상 고른 글쓰기를 할 수 있어. 획 굵기가 바뀌는 게 만년필의 매력인 건 맞지만, 공부용/필기용으로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획 굵기 변화가 오히려 방해될 것도 같아.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하는 '부드러운 필감'인 펠리칸이나 몽블랑 등의 부드러움과 라미케의 부드러움은 약간 다른 질감이야. 보통의 부드러운 펜들은 손과 종이의 흐름을 잘 받아주는 느낌 - 즉, 정교하고 예민한 느낌이라면, 라미케의 부드러움은 정교함보단 일정한 매끄러움에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펠리칸을 버터에, 라미케를 빙판에 비유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래서 라미케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젤리펜과 뭐가 다른가'라며 힐난하기도 해. 만년필 고유의 정교함과 예민함이 덜한 대신 항상 고른 출력을 선택한 펜이라서, 클래식한 필감을 선호하는 쪽에서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아. 나 역시도 이걸 쓰면서 "방금 사서 처음 쓰는 고급 볼펜같다"는 느낌을 받고는 해. 그래서 그런지 필기체보다는 둥글둥글한 어린 글씨에 맞는 것 같아.
피스톤필러에다 작은 크기, 나지막한 무게중심이라서 고시용 또는 전투용이라 불리는 펠리칸 M200/205와 포지션이 겹치기도 하는데, 필기량이 많고 글씨를 작게 쓰는 사람은 펠리칸보다 라미케가 더 좋을 것 같아. 그립부가 구분되지 않는데다 펜 끝에서 그립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서 글씨를 크게 쓰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불리하거든.
게다가 저... 메탈부와 배럴을 연결하는 부분에 살짝 튀어나온 저 알루미늄 돌기가 좀 거슬려. 나는 펜을 좀 길게 잡는 편이라서 저 돌기 바로 위에 손가락이 닿는데, 요즘에는 필각을 잡는 데 저 돌기를 사용할 정도로 익숙해졌긴 하지만, 여전히 개운하진 않아.
이 외에도,
• 처음에 받았을 때 배럴에 있던 미세한 헤어라인은 한 달 안에 사라지는 것 같아. 나름 빈티지한 멋이기도 한데, 사용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건 취향을 탈 것 같아.
• 피스톤필러에다 후드닙이고, 심지어 재질상의 이슈로 분해세척, 닙 교환 등이 까다로와. 관리를 잘못하는 초보들 또는 관리를 귀찮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물론, 매번 같은 잉크만을 쓰고 매일매일 쓴다면 상관없지만.
• 만년필을 오래 써 온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초보자들에게는 닙의 필각을 유지하는 게 다소 어려울 수도 있어. 위 이미지는 블루블랙이라는 만년필 샵에서 올린 이미지인데, 실제로 저것보다는 펜을 더 세워야 하고 더 아래쪽을 잡아야 제대로 된 필각을 찾을 수 있어.
• 클립의 성능은 좋은데 내구성이 썩 좋은 것 같지는 않고, 손으로 클립을 조작 (할 일은 없겠지만) 하면, 날카로운 모서리 때문에 느낌이 쾌적하진 않아. 특히 클립 끝이 찔릴 정도로 각져 있어서 가끔 긁히기도 해.
• 있기는 한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잉크창이 있어. 피스톤 필러의 특성상 많은 잉크가 들어가는지라 자주 충전해 줄 일은 없지만, 갑자기 떨어질 때를 대비하기 어려워.
총평
확실히, 라미케는 아이코닉한 명품이야. 디자인이 취향을 타긴 하지만 만듦새나 필기감, 사용성으로는 딱히 트집 잡을 게 없어. 1년 동안 꽤 험하게 다뤘는데도 내구성이나 틀어짐 등의 이슈도 전혀 없었고, 내 손에 맞게 길들수록 훌륭한 피드백을 주는 것 같아.
다만 관리 난이도가 좀 있는 편이고, 사용자의 숙련도(?)가 요구되는 건 감안해야 해. 2025년 2월 기준 평균 가격은 20만 원에서 30만 원 초반까지인데, 25만 원 중반 이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싼 가격은 아니지만, 20만 원 이하의 펠리칸이 하나쯤 있다면 라미케를 사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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