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아피스나 마이크로 같은 토종 만년필 회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망했고, 규모 있는 기업 중에서 만년필을 만드는 유일한 회사가 바로 모나미야.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응원을 하지만, 사 보면 참... 불편하더라구.
예쁘지. 모나미 라인(Rhein) 만년필이야. 왜 이름이 Rhein인지는 모르겠음. 독일이랑 연관이 있는 걸까?
재작년인가 - 성수동에 모나미 매장이 생겼대서, 저 아랫 노란+파란 놈을 2만 원 중반 정도에 사 왔어. 이전에도 모나미의 올리카나 153 NEO를 사 본 적이 있었는데 둘 다 너무 실망했었거든. 올리카는 너무 저퀄이었고, NEO는 '그래도 디자인은 중국에 맡기진 않았나 보네' 싶은 수준 정도. 하지만, 꾸준히 도전하는 국내 기업을 응원하고 싶어서 저 '라인 만년필'을 샀었는데, 앞의 두 제품보다는 훨씬 나아져서 깜짝 놀랐었거든.
반값도 안 되는 프레라나 카쿠노에 비하면 너무 별로인 필감이었지만, 어쨌든 디자인에 신경을 썼고, 나름 닙에도 공을 들인 게 좋아 보이긴 했어. 한 5년쯤 지나면 잘 만들겠구나 싶은 희망이 있었지.
그런데 우연히 쿠팡을 뒤지던 도중, 사진 위의 데몬 버전을 8,180원에 팔더라구. 굳이 살 필요는 없었지만, 2년 사이에 마이너 업데이트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데몬을 좋아하는지라 아무 생각없이 하나를 질렀어.
전체적인 조형성을 보면, 그래도 디자인에 신경을 썼구나 싶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허술한 부분이 많아. 파버카스텔을 닮은(?) 닙 디자인이라던지, 피드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건 프레라보다 예쁜 것 같지만, 배럴 양 끝 홀을 애매하게 막고 만다던지, 중결링이 캡 쪽이 아닌 배럴 쪽에 있다던지 하는 건 ... 만년필 전문 제작자가 모나미에 없는 걸까? 하는 의심을 하게 해. 근거는 없지만^^, 모나미의 의사결정권자는 "볼펜을 만드는 사람이 만년필도 잘 만들 수 있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건 아닐까 싶어. 디자인을 참신하게 시도한 것은 평가할 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잘 디자인된 "만년필"이냐 라고 하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만년필 덕후로서, 이 라인 만년필에서 유일하게 가치 평가를 해주고픈 부분은 '클립'이야. 소재가 좋은 건 아닌데, 넓은 면을 사용해서 장력을 단단하게 만든 건 좋은 시도인 것 같아. 잘 휘어지는 소재는 잘 부러지기도 쉬운데, 그걸 너비와 두께로 커버한 건 잘한 디자인이야. 넙데데한 클립 디자인을 앞으로의 모나미 시그니처로 가져가도 좋을 것 같지만, 시그니처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형태와 역학을 동시에 성취한 것은 칭찬받아 마땅해.
하지만, 이 만년필의 본질적인 문제, 이 글을 쓰게 만든 이슈는 바로 이 부분이야. 필연적인 크랙 발생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본론은 사실 이거야 ; 소재와 구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함을 3년째 고치지 않는 회사가 세상에 어딨냐! 응? 리콜은 바라지도 않는데, 계속 팔 거면 문제는 고쳐야 할 거 아냐!! (갑작스런 분노)
솔직히, 8천 원짜리 만년필에 큰 기대를 하는 게 도둑놈 심보긴 하지. 나도 인정. 그래서 f는 ef처럼, ef는 m처럼 나오는 것도, 슬릿 정렬이 안 맞아서 펜을 뗄 때마다 소음이 생기는 것도, 컨버터가 비스듬히 박히는 것도 다 그러려니 했어. 근데 이 크랙은 말이야... 너무 잘 보이는 문제잖아! 이걸 몰랐다면 검수를 안 하는 거고, 알고도 고치지 않은 거면... 이거 재고털이였어?
난 데몬 모델을 출시한 걸 보고 "오 내구성 문제를 잡은 건가?"라며 기뻐했어. 하지만 역시나 똑같이 저렴한 소재였고, 똑같은 이유로 크랙이 생기면서 마음이 짜게 식더라고.
뽕따 방식의 캡은 스크류 방식의 캡보다 정밀도가 덜 요구되기 때문에 저가 만년필에서 많이 쓰이는 방식이긴 하지만, 얘는 캡을 강하게 걸리게 하려고 돌기를 지나치게 크게 만들었어. 그래서 캡을 닫을 때의 힘이 일반 뽕따 만년필들보다도 많이 들어가고, 그 충격이 쌓이니까 캡이 깨지게 되는 거지. 배럴 쪽의 크랙도 마찬가지야. 이 소재의 특성상 (마찰력이 적게 일어나니까) 나사산을 돌려서 배럴을 잠글 때 '꽉 잠겼다는 피드백'이 없어. 그래서 안심이 될 만큼 잠그면, 이미 배럴은 자신의 내구도보다 더한 힘을 받게 되는 상황인 거야. 전반적으로 이런 항목은 플래티넘 프레라와 매우 유사한데, 소재의 경도나 나사산의 각도 등 디테일이 다르니 안정성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아.
이 두 문제 모두 정밀도의 부족과 잘못된 소재의 선택에서 왔다고 봐. (잘못된 소재의 선택이 원가 절감 때문이라고 한다면 모나미는 정말 희망이 없어 보여.) 가공이 어렵더라도 내구성이 높은 소재를 쓰던가, 내구성이 낮은 소재를 쓸 거면 조금은 더 정밀도를 확보하던가. 이 둘도 아니면 디자인적으로 구조를 틀어 보던가.
한국은 문구에 대한 수요와 안목이 높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간 사람은 일제, 독일제를 사용하게 되는 걸까. 나도 국산을 쓰면서 마음에 평화를 느껴보고 싶은데, 매번 국산을 써보려다가도 이런 일을 당하면 '그래, 검증된 게 좋은거야'라며 일본과 독일 제품을 사게 되는 상황... 맘이 편치 않아. 한국에 마지막 남은 만년필 제작사가 - OEM에 디자인만 입혀서 체면치레만 하는 것 같아서 아쉬운 맘에 글을 남겨.
할 거면 좀 잘하자 모나미.
( ps. 제일 중요한 '필감' 얘기를 안했는데, 먼저 산 것에 비해서 상당히 괜찮아졌어. 필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걸까? 글쎄, 아니라고 봐. 닙 굵기도 통제가 안되는 상황이니,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인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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