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만년필을 안 샀는데, 생일 쿠폰이 얼마 남지 않아서 모처럼 하나를 들였어. 카키모리 계열은 하나도 없었고, 이건 뭔가 한정판 색상이라고 해서 덜컥. 이것저것 쿠폰 붙여서 8만원 정도에 샀어. 9만 4천 원에 파는 걸 만 원 정도 싸게 산 거지.

사전에 알고 있었던 건 이 닙이 슈미트 거라는 거. 사실 개인적으로는, OEM 닙중에서 가장 꺼려지는 게 슈미트야. 복(Bock)은 뭐 그러려니 하고 쓰고 요보도 그럭저럭 쓸만한데, 슈미트는 제법 데인 적이 많거든.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니 나만 당한 걸 수도 있고.
일단 색상이 졿아. 사진은 녹색처럼 나왔지만 실제로는 회색에 가깝고. 플라스틱이지만 모나미 만년필같은 싼 질감은 아니야. 그렇다고 고급이라는 느낌은 안들지만 이 정도면 준수하다고 생각해. 일반적인 폴리카보네이트보다는 밀도가 가벼운 느낌이 살짝 아쉽긴 하지만, 가격이 싸잖아.
무엇보다 이 가격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디자인인데, 특히 양쪽 끝부분의 타원을 고유 설계한 것처럼 둥글린 게 마음에 들었어. 일반적인 저가 만년필은 오차와 공정을 줄이기 위해 끝이 트인 상태로 대롱을 만들고 끝에 볼을 박아서 둥글게 다듬는 형태가 많은데,


최소한 이 펜은 이 짓은 안했어. 곡률을 천천히 줄여서 부드럽게 마감했는데, 나는 저가 만년필 살 때 이걸 먼저 보는 편이야. 제조사가 디자인을 신경쓰고 있는지, 잘 만들어진 펜인지를 구분하는 나만의 팁. (그런데 위 이미지 왼쪽의 시키오리는 저거 빼곤 참 훌륭한데 ㅠㅠ)
디자인을 많이 신경써서 전반적으로 매끈하고 보기 좋게 만들었어. 성형 자국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것도 잘 보여. 사출성형의 접합부위를 안보이게 다듬는 건 애초에 포기한 것 같지만, 나름 그걸 디자인인 척 위장하는 건 보기 좋았어.
그런데,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것과, 사용하기 좋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
미리 결론 : 스틸 닙, 나쁜 그립감. 무게중심도 애매.
캡을 뒤에 꽂고 써도 괜찮아. 디자인을 보면 빼고 쓰라는 것 같지만. 근데 캡을 뒤에 꽂든 빼든 균형감은 안좋아. 그립이 성인 남자 기준으로는 너무 얇고, 얇은 두께에 어울리지 않게 그립영역이 길어. 캡을 뒤에 꽂지 않으면 뒤쪽으로 배럴이 가늘어지는 비율이 커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배럴이 얹히는 느낌도 좋지 않아.
그렇다고 필각을 올려서 수직에 가깝게 쓰는 세필 형식의 펜이냐 하면, 또 그것도 어색한게. 그립부분과 윗부분 두꺼운 부분의 무게 중심이 안맞기 때문에 펜 끝이 불안해져.
작은 손, 여성의 가는 손이면 좋을 것도 같아.
이 가는 닙과 돌기없는 매끄러운 질감은 섬세한 여성의 손에는 맞겠다 싶어. 애초에 닙 설정도 날카로운 편이고 섬세하게, 힘 주지 않고 쓰기를 권고하는 것 같으니, 가볍게 손을 얹어서 쓰는 작은 손의 여성이 날아가듯 쓰는 게 가장 적당할 것 같아. 아니면 안쪽으로 이상하게(?) 주먹쥐고 쓰는 사람들이 한자한자 작게 또박또박 쓰는 것에는 맞지 않을까 싶고.
닙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닙은 내가 써 본 슈미트 중에 최고야. 그래봐야 꼴등반의 일등같은 거지만, 이제 슈미트도 꽤 좋은 품질을 내는 것 같아. 전형적인 스틸닙의 질감이야. 낭창낭창이고 부드럽고 그런 거 없고, 한 달 정도 빡세게 굴리면 잘 연마되는 전통적인 쇠 닙. 약간 힘을 줘서 눌러보면 제법 말랑거리며 휘어지긴 하니까, 얇아서 금방 길들여질 것 같아.

이 그림은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닙의 품질 영역이야.
대부분의 닙은 '사각거리는가'와 '부드러운가'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데, 일본, 미국 쪽 펜이 사각에 가깝고, 유럽, 중국 쪽이 물렁 쪽이지. 사각거리는 건 정교하게 쓰이는 느낌과 빠른 반응 속도가 장점이라 마치 칼을 쓰는 듯한 즐거움이 있는 반면, 잘못 만들면 종이를 긁고, 종이에 대한 저항감이 강해서 장기 필기에 부담스럽게 되지. 반면, 물렁 쪽은 소위 '버터 필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종이에 펜이 직접 닿지 않는 것 같은 미끄러짐과 돌돌 굴러가는듯한 느낌이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지. 그래서 많은 필기량을 가진 사람들은 버터 필감 쪽을 선호하는 거고. 하지만 이쪽 방향도 단점이 있어서, 중국 애들이 유럽 펜을 흉내내느라 지나치게 갈아버리면, 종이와 잉크의 피드백이 없이 먹먹한 느낌이 되고, 젖은 종이에 쓰는듯한 불쾌감도 생겨.
이 펜은 종이를 긁을 정도는 아니지만, 너무나 정직한 스틸닙이어서 필기의 반발감이 그대로 전해져 와. 그래서 장기 필기가 어려운 편에 속해. 조금 더 연성으로 하면 좋았을텐데 아쉬워. 또다시 그립에 대한 불만을 할 수 밖에 없는게, 이 닙을 그대로 두껍고 미끄럽지 않은 그립을 가진 펜에 붙인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좋은 필기감을 주었을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펜에는 라미2000 같은 속성의 금닙이 있었어야 한다고 봐.
그립은 물론 시원하고 예쁜데, 마찰감도 없고 지나치게 매끄럽고, 닙 가까운 곳의 턱진 것도 작아서 의미가 없어 보여.
전반적으로 악평에 가깝지만, 그래도 나름 객관적인 평가를 하자면 이 펜은 별 셋 반.
기본적인 닙의 퀄리티와 본체의 마감 등은 가격 대비로 보면 충분히 괜찮아. 특히 요즘처럼 모든 회사가 값을 올리고 있는 이 시국에 이 가격이면 혜자라고 생각해. 디자인은 훌륭하지만 기능적으로는 별로야. 잘 안쓰는 다이어리나 회사 노트에 꽂아뒀다가 가끔 쓴다면 색다른 재미가 있겠지만, 이걸로 많은 양의 필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남자보다 여자 유저에게 확실히 좋을 것 같고, 구조상 펄이나 기름진(?) 잉크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펑펑 쪽 잉크 (4001이나 j허빈 계열, 이로시주쿠 정도)를 넣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고. 호보니치 펜이니 당연히 호보니치 종이랑 궁합이 좋은데, 미도리도 쓸만은 하고, 약간 폭신한 계열인 LIFE나, 매끈한 재질의 로디아에는 안맞을 것 같아.
아, 장점을 하나 빠뜨렸는데, 뚜껑이 스크류식으로 열리는데, 나사산이 적고 작아서 금방 열고 닫을 수 있어. 꽉 잠기는 느낌도 있어서 닙도 잘 안마를듯.
결론? 이뻐. 근데 자주 쓰지는 않을 것 같아. 자신이 여자고 손이 작으며 글씨를 작게 새겨 쓰는 스타일이다? 그럼 뭐, 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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