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고민하는 문제 :
나쁜 예술가에게서 나온 좋은 예술품은 어떤 지위를 가져야 하는가.
예술가의 창의력은 항상 신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 한다던가, 결핵과 같은 질병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던가. 심지어는 자신이나 연인의 생명을 담보로 하던가. 수많은 설화와 소설, 영화 등에서 이런 플롯은 수없이 반복된다.
이런 오래된 신화 덕분에, 예술가들의 괴벽이나 기행은 용인되며, 심지어는 숭배된다. 그들의 질병이나 요절, 파란만장한 삶의 고난도 마찬가지로 신화화된다. 대중은 예술가들을 마치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처럼 과장하여 이야기한다. 즉, 군중은 예술과 예술가들을 신비화하는 동시에 타자화한다.
오래된 서양의 밈으로서 '바보(광인)들의 배 (Narrenschiff)' 라는 게 있다. 중세시대의 정신병자들을 넉넉한 음식과 함께 배에 태워서 바다로 떠밀고, 마냥 바다를 떠돌다가 우연히 육지에 닿으면 다시 음식을 채워주고 바다로 다시 떠미는 격리 장치. 그러다가 죽으면 그건 신의 뜻이지, 격리한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는 논리. 실제로 이런 격리 정책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주제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논외로 하자.
이 배에는 범죄도 있고 고통도 있고, 탐욕도 있고 나태도 있지만, 중세의 규범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래서 표현에도 제약이 없고, 쾌락을 추구해도 된다. 지켜야 하는 질서도 없고, 금지된 규정도 없다.
대중은 그들이 자신과 격리되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안심한다. 또한, 그들을 내쫓기는 했으나, 그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소비한다. 자신의 현재를 안위할 목적으로 비교하거나, 그들의 기행을 은밀히 즐기기도 한다. 그들의 필연적인 불행을 예상하면서.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른 이야기는 고흐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마치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인 것처럼. 그게 그의 그림과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시대가 바뀌어, 이제 모든 예술가들은 배에서 내려 시민의 지위를 얻었지만, 대중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예술가 스스로도 자신이 어디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리고, 사실... 배 위의 예술가가 훨씬 더 매력적이다.)
이 인식의 간극이 예술가를 지나치게 부각시켰다. 어느 정도 관조되던 예술가들의 방종은 이제 정치인이나 지도층 인사의 범법행위보다 더 큰 비난을 받는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고, 법률 위반보다 도덕적인 문제로 보이콧당한다. 심지어 비난은 예술가를 넘어서 그들의 예술품에게도 덧씌워진다.
어떤 회사가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켜 그 회사를 보이콧할 때도 그들의 제품 자체를 폄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술품이 그 작가의 도덕성으로 인해 보이콧될 때는 예술품의 진정성까지 타격을 입는다. 아직까지 예술품은 예술가가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중의 인식 기저에서 예술가는 광인이고, 괴물이고, 바보라서 - 그가 '낳은' 예술품까지 괴물 취급을 받는 것이리라.
범죄를 저지른 예술가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는 예술가가 아니었다"라고 배척해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동시에 예술품이 이룬 성취를 폄훼해야 한다는 딜레마 때문에, 섣불리 그럴 수도 없다.
현재의 예술가들이 시민으로서의 규범을 지켜야 하는 것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폭력과 범죄를 정말로 미화했던 김기덕 감독의 경우 (어떻게 보면 언행일치) 라던가,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예술적 성취를 이룬 레니 리펜슈탈 (위키)의 경우, 그들의 예술품에 묻은 함의가 불결하기 때문에, 예술품으로서의 가치에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예술품 자체를 배척하는 것과는 다르다. (소수의 선의에 의한 반달리즘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
존 라세터는 토이스토리 및 많은 픽사 영화를 만든 감독이고, 케빈 스페이시는 유주얼 서스펙트, 아메리칸 뷰티, 하우스 오브 카드 등의 영화에서 호연을 펼친 배우이다. 개인적으로는 - 비도덕적인 범죄로 인해 사회적인 매장을 당한 여러 사례 중에 - 이 두 명의 소식이 가장 슬펐다.
그들은 성폭력 혐의로 기소되었고, 곧 모든 채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인물들이 그간의 연기와 창작을 통해서 미래에 벌어들이는 수입을 감소시킬 목적으로 지난 작품들을 보이콧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들에게 다음 기회를 주지 않는 것 역시 정당하다. 하지만 그들의 예술품을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통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해할 것 같아서 말하지만, 성폭력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교롭게 두 명이 같은 죄목일 뿐. 김기덕과 리펜슈탈의 경우, 그들이 저지른 죄와 그들의 예술품이 지향하는 바가 겹치고 또한 불온해서, 그들의 작품 역시 재평가되어야 하지만, 존 라세터와 케빈 스페이시가 작품 속에서 성편견을 강조하거나 성폭력을 용인하려는 태도가 묻어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두 사례는 마땅히 다르게 취급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바보들의 배에 승선하는 것이 예술가 스스로의 자유를 보전하고, 마스터피스를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범죄를 저지르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라 - -a) 하지만, 예술가들이 사회적인 성취에 경도되니까 문제가 생긴다. 배에 남을 거면 예술적인 성취에만 집중하고, 배에서 내릴 거면 좀 시민답게 살자. 대중의 예술/예술가에 대한 이해도 문제이지만, 이는 쉽게 바꾸기 어렵다. 아마도 대중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인종차별 문제나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일이기 때문이다.
* 내용 중 '그'는 남성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단순 인칭대명사로서 사용했다. 한국인이 굳이 '그(그녀)'라는 표현을 쓰는 게 유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섬네일의 그림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바보들의 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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